낙화(烙畫) · 도락(刀烙) · 낙각(烙刻) · 낙(烙)이라고도 한다. 낙화에 주로 사용되는 도구는 ㄱ자형 인두이며, 끝이 뾰족한 것과 무딘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인두를 달구는 데에는 소나무 숯불을 피운 질화로를 사용한다.
낙죽의 기본무늬는 을자(乙字) · 박쥐 · 구름 · 산수 · 사슴 · 송학(松鶴) · 매화 · 난초 · 포도덩굴 · 죽엽(竹葉) · 다람쥐 · 왕새우 · 속새 · 조 등 민화풍이며, 이 무늬들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그리기도 한다.
낙죽의 무늬는 농담의 차가 심하거나 선(線)의 오르내림이 있는 것은 잘된 작품이 아니며, 성글고 조밀함이 잘 조화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인두가 뜨거우면 곧추 세우고 식으면 뉘어서 온도에 의한 농담을 조절하며, 인두가 완전히 식기 전에 연속된 무늬를 완성시켜야 된다.
낙죽하는 방법은 왼손에 댓가지를 쥐고 평좌친 왼발 위에 댓가지를 대어 오른손에 쥔 인두와 댓가지를 함께 밀어내는 식으로 한다. 이것은 합죽선의 변죽과 속살, 참빗의 등대, 장죽 · 대지팡이의 마디 부분, 죽제필통 등에 주로 장식되며, 그밖에 대로 만든 죽장가구 중에서도 이따금 볼 수 있다.
낙죽이 기물(器物)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부터이며, 관청 소유의 기물 등에 관청명을 낙인하여 다른 것들과 식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기물의 장식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청나라 초기인 1700년경부터이다.
청나라 윈난성(雲南省)무정주(武定州)에 무염(武恬)이라는 사람이 있어 섬세한 조각기법과 함께 낙죽기술이 뛰어나, 숯을 붓처럼 깎아 불을 붙여 가는 대나무 젓가락에 산수 · 인물 · 대각(臺閣) · 조수(鳥獸) · 임목(林木) 등을 그렸다. 특히, 그의 뛰어난 작품은 18학사도(十八學士圖)를 대젓가락에 그린 것으로 매우 비싼 값에 매매되었다.
무념은 절개가 높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는 낙화를 해주지 않았으며, 가난한 선비나 스님들을 만나서 궁색해 보이면 보수 없이 한 잔의 술만으로 젓가락에 낙화를 해주므로, 그의 기행(奇行)과 함께 낙죽기술은 명성을 더 얻게 되었고, 우리 나라에까지 무념이 낙죽의 제일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1800년 이전에는 낙죽을 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으며, 뛰어난 제품도 없었다. 다만 목공기물에 이용되는 소나무나 오동나무를 인두로 지져 나뭇결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기법만이 널리 쓰였을 뿐이다.
순조 말엽에 대방주(帶方州 : 지금의 나주)출신인 박창규(朴昌圭)라는 사람이 조각과 함께 낙죽을 매우 잘하였다.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경재(京宰 : 서울의 재상집) 문하에 들어가 기이한 물건을 많이 만들었다.
박창규는 숯 대신 아도(砑刀 : 인두의 옛 명칭)로써 대나무를 붉게 지져 낙화를 그렸는데, 성글고 알참과 짙고 옅음이 탁월하여 사람들은 불가사의한 재주라 일컬었으며, 청나라의 무풍자보다 우수하다고 하였다. 이 시기에는 죽편뿐 아니라 종이에도 화조(花鳥)와 영모(翎毛:새와 짐승)를 낙화하여 그 유품들은 현재까지도 전한다.
박창규의 후진들은 기법이나 재능이 스승을 능가할 수 없었으며, 또 도락은 아주 어려워서 낙판(烙版)을 만든 뒤 기물에 신속하게 낙인을 하여 무늬를 만들었다. 낙판에 의해 찍힌 무늬들은 언뜻 도락처럼 보이나, 판이 세밀하지 못하므로 찍힌 무늬들은 정교하지 않았고 섬세한 변화가 없는 도식화된 무늬가 되었다.
따라서, 낙화 본래의 짙고 옅음이나 손놀림에 따라 나타나는 섬세한 변화는 나타내지 못하고 낙화의 기법은 점차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낙판은 놋쇠로 주형을 만들어 불 위에 올려놓고 쇠가 달았을 때 그 위에서 굴리면 무늬가 찍힌다. 이와 같은 낙판을 근래에는 사용하지 않으나, 부채의 산지인 남원과 담양 일대에서 작은 무늬가 있는 철인(鐵印)으로 부챗살에 낙인을 하며, 인두로 그리는 낙죽은 주문에 따라 제작하고 있다.
낙죽기능은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서울과 전라도지방에 전승되었으나, 현재는 전라도의 죽세공품 제작지에서 하청에 의하여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며, 최근에 들어 관광지의 토산품점에서 거친 솜씨로 낙화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현재 전라남도 담양의 국양문(鞠良文)이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된 낙죽장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아, 후진을 양성하고 기법을 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