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목판은 모두 185매로, 남명(南冥)조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1905년에 판각한 을사판(乙巳板)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山天齋)에 소장되어 있다.
남명의 수제자격이며 대북의 영수인 내암(來庵)정인홍(鄭仁弘)이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처형된 뒤 기피 인물이 되어 그가 주편한 남명의 문집도 많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정인홍이 지어 넣은 글과 그의 이름을 삭제하고 남명의 결점이 될 만한 글을 산절하는 작업이 인조 이후 구한말까지 14차례나 이루어져 문헌적 상흔(傷痕)을 입었다. 그래서 『남명집』은 무수한 판본이 있게 되었다. 『남명집』은 초간본 이후 크게 4개의 계통, 즉 병오판 계통 · 숙종판 계통 · 갑오판 계통 · 을사판 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판각은 네 번째인 을사판 계통에 속한다.
『남명집』은 1604년(선조 7)에 최초로 편찬 간행되었는데, 이를 갑진판본(甲辰板本)이라고 한다. 여기에 정인홍의 서문이 있다. 갑진판은 해인사에서 판각하고 보관하였는데 인포(印布)한 지 얼마 안되어 장판각이 불타 소실되었다.
갑진판이 소실된 지 몇 해만에 다시 1606년(선조 39)에 정인홍의 문인인 허종선(許從善)이 간본(刊本)을 써내고 경상도 관찰사 류영순(柳永詢)이 공역을 도와 중간하였다. 이것이 병오판이다. 병오판 계통은 그 뒤 1609년(광해군 1)과 1622년(광해군 14)에 개정 추록하여 간행되었고, 인조반정이 있은 지 30년째 되는 1652년(효종 3)에 하홍도(河弘度)의 문인인 이집(李集)과 하자혼(河自渾)이라는 유생이 덕천서원에 난입하여 『남명집』 중 정인홍 관계 책판을 다 부숴버려서, 덕천서원 원장이 다시 임술판(1622년에 간행된 판)을 복간(復刊)하였다. 『남명집』 중에서 정인홍이 지은 글과 정인홍이란 이름 등을 삭제하는 작업이 인조반정 이후 지속적으로 논의되었으나 실현에 이르지 못하다가, 1670년(현종 11)에 마침내 정인홍이 지은 서문과 행장을 포함하여 그가 지은 관련 글을 삭제하고 보판을 삽입한 판본이 간행되었는데, 이것이 최초의 이정본(釐正本)인 경술판이다.
숙종판 계통은 숙종판, 병신판, 병진판, 순조판으로 나뉘어지는데, 숙종판 문집은 전면 개편하여 개간한 것이다. 경술판까지 보유에 있던 남명의 시문을 숙종판에서는 한데 모아 엮어 1~2권에 통합 · 분류 · 편집하였고, 따로 간행 · 유통되던 『남명선생학기류편(南冥先生學記類編)』상하 2책을 3~4권에 상하로 편입하였고, 5권에 부속 문건을 한데 모아 편성하였다. 1764년(영조 40) 갑신판에서는 별집의 책판만 교정하고, 1796년(정조 20) 병진판과 순조판에서는 제문을 추각(追刻)하거나 개각(改刻)하였다.
갑오판 계통은 갑오판과 정유판으로 나뉘어지는데, 갑오판은 1894년에 간행된 것으로 남명선생문집 · 남명선생속집 · 학기로 이루어져 있다. 갑오판의 경우는 문집과 학기를 지나치게 혁신 · 수정한 결과 당시 지역사회의 커다란 반발을 샀다. 1897년(광무 1)에 편찬한 정유판은 기존의 체제에서 남명선생편년(南冥先生編年)을 추가하였다.
마지막으로 을사판 계통은 을사판과 신미판이 있다. 을사판은 을사년(1905)에 완간된 것으로 정유판의 편년 대신 부록연보를 새로 편찬하여 편입하였고, 문집과 속집에서 부고이(附考異)를 삭제하였으며, 학기류편간보(學記類編刊補)에서 간보(刊補)를 삭제, 구체제에 맞게 개편하였다. 신미판은 1931년에 산청 한문서당(漢文書堂)에서 간행한 것으로, 문집과 속집 및 학기는 을사판과 같고, 부록은 연보 대신 편년이 편입되었다. 을사판과 비교하여 판각한 글씨도 다르고 신명사도(神明舍圖)가 특히 다르다.
이 판목은 『남명집』계통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러 판본 계통의 하나이지만 『남명집』판본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