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9월 북한의 대남 수해물자 지원을 계기로 남북접촉 창구가 다시 열리고 1984년 하반기부터 1985년까지 남북 사이에 대화와 교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1985년 4월 9일 북측은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양형섭 명의로 남한측의 채문식 국회의장 앞으로 서한을 보내 ‘남북불가침 선언’ 채택 문제를 논의하자며 양측 국회의원(북한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간 회담을 제의하였다. 이것이 남북국회회담의 출발점이 되었다.
첫 예비접촉은 1985년 7월 23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렸으며 남한측 대표는 권정달(權正達, 민주정의당)을 수석대표로 정시채(丁時采, 민주정의당)·박관용(朴寬用, 신한민주당)·신순범(愼順範, 신한민주당)·강경식(姜慶植, 한국국민당) 등 5명이었고, 북한측 대표는 전금철(全今哲, 조선노동당)을 단장으로 주창준(朱昌俊, 조선노동당)·최장룡(崔長龍, 조선노동당)·염국렬(廉國烈, 조선사회민주당)·우달호(禹達鎬, 천도교청우당) 등 5명이었다.
제1차 예비접촉에서 양측은 회담형식·대표단규모·회담장소·회담일시·대표단왕래절차 등의 문제에서는 합의를 보았으나 주요 사안인 의제문제에서 의견이 맞섰다. 의제문제에 있어서 북한측은 국회회담을 제의할 때부터 ‘불가침선언’문제를 주장하였고, 남한측은 불가침을 비롯한 전쟁과 평화에 관한 교섭, 조약체결 등은 관계 정부당국의 소관이기 때문에 국회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남한측은 남북국회회담에서는 입법기관 고유의 권능에 따라 ‘통일헌법제정’문제를 비롯하여 남북 국회의원들의 친선과 교류 등 ‘통일기반조성에 필요한 사항’을 협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불가침선언 등의 문제는 남북한당국 또는 최고책임자회담에서 협의, 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의제에 대한 의견대립은 그 해 9월 25일 비공개로 열린 제2차 예비접촉에서도 진전을 보지 못하였으며, 다음해 2월 18일 갖기로 했던 제3차 예비접촉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문제 삼은 북한측의 무기연기 요청으로 열리지 못하였다.
그 뒤 2년 11개월 만에 열린 1988년의 준비접촉은 그 해 7월 9일 대한민국 국회의 ‘서울올림픽대회에의 북한참가촉구결의문’ 채택과 이에 대한 북한의 ‘남북국회연석회의’ 제의에서 비롯되었다.
양측은 서한을 통해 5명의 대표단 명단을 통보하고 1988년 8월 19일 판문점 북한측지역에 있는 통일각에서 제1차 준비접촉을 가졌다. 이 접촉시의 대표단은 남한측이 박준규(朴浚圭, 민주정의당)·이한동(李漢東, 민주정의당)·김봉호(金琫鎬, 평화민주당)·박관용·김용환(金龍煥, 신민주공화당) 등 5명, 북한측이 전금철(조선노동당)·안병수(조선노동당)·이동철(조선노동당)·이주웅(조선사회민주당)·박문찬(천도교청우당) 등 5명이었다.
이후 남한측은 수석대표를 채문식(蔡汶植, 민주정의당)으로 교체하고, 이한동·김용환 두 대표를 김현욱(金顯煜, 민주정의당)·이희일(李熺逸, 신민주공화당)로 교체하였다. 이 제1차 준비접촉 후 1990년 1월 24일 제10차 준비접촉에 이르기까지 양측은 본회담 의제문제를 비롯한 회담형식, 대표단 구성, 운영절차 등을 협의하였으나 회담은 끝내 결렬되었다.
이 때의 주요 쟁점은 본회담 의제문제였는데, 남한측은 남북간의 다각적인 교류협력문제, 남북불가침선언 문제, 남북정상회담 개최문제를 주장하였고, 북한측은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 군사연습 중지문제, 불가침에 관한 공동선언 발표문제, 남북협력과 교류문제를 주장하였다. 양측은 제11차 준비접촉을 1990년 7월 19일 갖기로 합의하였으나 북한측의 일방적 무기연기 통보로 열리지 못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6월의 1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관계는 질적인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남측 국회는 남북 국회회담과 의원차원의 교류를 성사시키기 위해 다각적이고 지속적으로 접촉과 제안을 했다.
먼저 1차 남북정상회담 대표단에 정당대표로 방북한 의원단(이해찬, 이완구 의원)이 남북 국회회담 재개를 제의했고, 북측도 긍정적 반응을 보임에 따라 이만섭 국회의장은 7월 17일 제헌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 국회회담을 공식 제의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북 당사자간 대화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므로 국회회담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보여 진전되지 못하였다.
2002년 9월 20일에는 1990년 남북 국회회담 준비접촉 결렬 이후 처음으로 남한 국회 대표단(단장 김태식 국회부의장)이 평양을 방문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과 만났다. 양측은 빠른 시일 내에 남북 국회회담을 개최한다는 원칙에는 의견을 모았으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2004년 11월 30일에는 파키스탄에서 열린 ‘평화를 위한 아시아 의회연합’(AAPP) 제5차 총회에 참석한 배기선 국회 남북관계발전특위위원장이 최태복 북한 최고인민회의 의장에게 남북 국회회담을 포함해 남북간 실질적인 대화 재개를 요청했으나 북측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고 나와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2005년 6월 16일에는 평양의 6·15 통일축전에 참가한 여야 4당 대표단이 정당·정치분과 모임에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과 남북 국회·정당간 교류협력 추진에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양측이 ‘한반도에서의 전쟁반대’, ‘남북교류협력 지속’, ‘남북 국회차원의 교류협력 진행’ 등에 합의했다고 밝혔으나, 그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같은 해인 2005년 7월 17일 제헌절 경축사에서 김원기 국회의장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뿐만 아니라 남북의 공동발전을 위해서 ‘남북 국회회담’을 제안했고, 남북 국회회담과 병행해서 6자회담 참가국 의원들로 구성된 ‘동북아 의회회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해 8월 16일에는 북한 대표단이 최초로 남한 국회를 방문해 남북 국회회담 성사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기도 하였다. 남측의 제안에 대해 북측의 김기남 8·15 민족대축전 북측대표단장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역시 진전은 없었다.
2007년 10월 3일 평양에서 개최된 2차 남북정상회담에 특별수행원으로 참석한 김원기 전(前) 국회의장 등 국회·정당 관계자들은 최태복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 북측 관계자들을 만나 남북 국회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요청했으나 북측은 여전히 6·15공동선언에 대한 남북한 국회의 공동지지 선언을 제안했다. 양측은 자주 만나서 신뢰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는 데는 공감했으나 서로의 제안에 대해서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08년에는 김형오 국회의장이 제헌절 60주년 경축사를 통해 남북 국회회담 준비 접촉 재개를 북측에 촉구했고 “이것이 어렵다면 의장단이나 관련 상임위 차원에서라도 먼저 교류를 시작할 것을 제안”해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했으나 북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