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양(英陽). 별명은 남우팔(南又八), 자는 우팔(禹八). 경상북도 청송 출신. 남천주(南天柱)의 후손이며, 산남의진(山南義陣)에서 활약한 남석문(南錫文)의 육촌이다.
남석우(南錫佑)의 포군에서 종사(從事)로 일하던 중,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체결 소식을 접하였다. 이 때 고종의 시종관을 지내던 정환직(鄭煥直)이 아들 정용기(鄭鏞基)를 고향 영천으로 귀향시켜 산남의진을 구성할 것을 명하자, 이에 가담하여 청송지방 소모장이 되었다.
서종용(徐鍾容)·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 등과 모병활동을 하며 때를 기다리다가, 4월 정용기가 대구에서 아버지 정환직이 체포되었다는 관의 유혹에 빠져 붙잡혀 구속되었다.
정용기의 사촌 사홍(士弘)이 의병 30명을 거느리고 활약하고 있음을 듣고, 4월 12일 이운경(李雲景)·정천여(鄭千汝)·남석문과 함께 출전하였다. 경주를 거쳐 영덕에 이르러 이한주(李漢主) 의진과 합진, 포대장이 되었다.
26일 80명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영덕 적암지(赤巖地)에서 경주 진위대의 습격을 받아 의병을 해산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5월 정사홍의 권고로 다시 거의하여 각처에서 군자금을 모금, 이세기(李世紀)와 구입한 무기를 감추어두고, 청송 보현산(普賢山)에 유진하였다. 6월 포군 모병차 입암(立巖) 등지에서 활약하던 중 이세기와 함께 붙잡혔는데 이세기는 탈출하였다.
1907년 9월 4일 재판에서 종신형을 언도받았으며, 무기은닉처문제로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