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신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사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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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고려 후기에, 사관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공민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피난갔다가 1363년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때 종묘의 신주를 임시로 미타사(彌陀寺)에 봉안하고 환안도감(還安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상고할 만한 전적(典籍)이 없었으므로 남영신이 해인사 사고(海印寺 史庫)에 가서 삼례도(三禮圖)와 두우(杜祐)의 『통전(通典)』을 가져와서 의제(儀制)를 삼았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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