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내탕고의 재물을 지급할 때는 먼저 내알자(內謁者)를 불러 승지에게 전하면, 승지가 다시 임금에게 가서 확인한 다음 왕패(王牌)에 서명을 받아 실시하였다.
임금이 내탕고의 재물을 쓰는 용도는 다양하였는데, 각종 재해로 인한 구제와 기근으로 인한 진휼이 필요할 경우, 활자를 주성하거나 나무에 새겨 책을 펴내는 데 비용이 필요할 경우 등에 지급해 주었다. 활자의 주성에 내탕고의 재물을 내준 사례는 1403년(태종 3) 주조의 계미자(癸未字)에서 볼 수 있다.
계미자의 주조에 많은 비용이 필요한데, 그것을 백성들로부터 거두는 것이 부당하므로 임금이 종친·훈신의 신료 가운데에서 뜻있는 이들로 하여금 내게 하는 한편, 모자라는 것은 내탕고에서 모두 지출하여 활자를 주성하게 하였다. 목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내는 데 내탕고의 재물을 내준 사례는 인경자본(印經字本)에서 볼 수 있다.
성종이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 위해 정현대비(貞顯大妃)와 인수대왕대비(仁粹大王大妃)가 1495년(연산군 1) 원각사(圓覺寺)에서 대대적으로 불경을 찍어냈다.
이 때의 인경(印經)은 국역본 ≪법화경≫·≪능엄경≫ 각 50부를 비롯하여 ≪금강경육조해≫·≪반야심경≫·≪선종영가집 禪宗永嘉集≫ 각 60부, ≪석보상절≫ 20부, 그리고 한자본 ≪금강경오가해≫ 50부와 ≪육경합부 六經合部≫ 30부였다.
이들 경에는 동일한 내용의 발문을 붙였는데, 그 발문은 새로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냈다. 이어 1496년에는 ≪천지명양수륙잡문 天地冥陽水陸雜文≫ 200부를 찍어냈고, 또 한글활자를 만들어 국한문본 ≪육조법보단경 六祖法寶壇經≫과 ≪진언권공 眞言勸供≫을 각각 300부 찍어냈다. 이 국한문활자를 ‘인경자’ 또는 ‘인경목활자’라 일컫는다.
유신(儒臣)들이 불경간행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은밀히 내탕고의 재물을 내서 도와준 것이다. 이와 같이 대비들이 내탕고의 지원을 받아 정성껏 목활자를 만들어 찍어낸 책이기 때문에, 활자체가 바르고 가지런하며 먹의 빛깔도 진하고 선명하여 인쇄가 깨끗하고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