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篚)·협(篋)·광(筐) 등의 죽기(竹器)를 의미하였던 광주리에서 나온 말이다. 초기에는 뚜껑이 위에 있다가 점점 상자 앞면에 문을 달아 옷을 넣는 데 편리하게 하여 사용하다가 이를 포개어서 옷장으로 썼던 것 같다.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섬용지(贍用志) 권3에 “농은 원래 죽기를 의미하였던 것인데, 나무나 고리버들로써 만든 것을 농이라고 불렀다……라고 농의 시원을 알려주고 있다.
원래 농에는 개판(蓋板 : 맨 위에 댄 나무판)이 없는 것이 장(欌)과 다른 점이지만, 후에는 농에도 개판 혹은 다리부분인 마대(馬臺)를 붙여 이를 ‘개판농’ 혹은 '마대농'이라고 불렀다.
또한 서민주택에서는 상자의 안팎에 종이를 바른 함롱(函籠)을 사용하였는데, 바닥에 놓고 썼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불려졌다.
구조는 널과 널로 접합된 것이 대부분이며, 그 짜임새는 한쪽 널에 촉을 만들고 다른쪽 널에 구멍을 뚫어 맞추는 촉짜임을 썼으며, 모서리는 각 이음새마다 고춧잎모양 혹은 기타 감잡이(양쪽으로 걸쳐 박는 쇳조각) 주석장식을 달아 견고하게 하였다. 또 문판 아래와 양쪽 널에 큰 달형 들쇠가 하나씩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후기에는 장과 같이 앞면에 쇠목과 동자주로 마름칸 및 쥐벽칸을 나누었고, 내부는 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나 외형은 한층으로 된 농도 만들어졌다.
농의 재료는 가볍고 좀이 안 스는 오동나무가 애용되었으며, 안방용인만큼 나뭇결이 아름다운 먹감나무·느티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나전(螺鈿)이라든가 지롱(紙籠 : 초화문양을 그려 기름을 바른 것)·죽장롱(竹欌籠) 등도 애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