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에 특히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1759년(영조 35) 나주(羅州)에 있는 기술자 나경적(羅景績)과 그 문인 안처인(安處仁)에게 의뢰하여 3년간의 작업 끝에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식 자명종[候鐘]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천문의기를 그는 자기 집 남쪽 마당에 호수를 파고 그 가운데에 정자를 지어 그 안에 보관하였고, 이 관측소를 그는 두보(杜甫)의 시 “日月籠中鳥乾坤水上萍(일월농중조 건곤수상평)”의 한 구절에서 따서 농수각(籠水閣)이라 불렀다.
1766년 북경 방문에서 돌아온 뒤 그의 농수각에는 다른 천문기구들이 더 만들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통천의(統天儀)·혼상의(渾象儀)·측관의(測管儀)·구복의(勾服儀) 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홍대용 자신이 이들 관측기구로 천문관측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직접 이 기구들을 만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일단 만든 기구는 실제 관측보다는 보고 즐기는 정도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 정도의 열성이나마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값진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농수각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