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안기 ()

과학기술
인물
조선 후기에, 통신사 독축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역법을 전수하여 일본 최초의 천문계산법 제작에 영향을 준 학자.
이칭
나산(螺山)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08년(광해군 즉위년)
사망 연도
미상
본관
밀양
주요 관직
독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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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조선 후기에, 통신사 독축관으로 일본에 건너가 역법을 전수하여 일본 최초의 천문계산법 제작에 영향을 준 학자.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밀양. 호는 나산(螺山). 국내에서의 활동은 아직 연구되어 있지 않으나, 1643년(인조 21) 일본에 건너가 일본 천문학자에게 ‘칠정산(七政算)’을 가르쳐 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천문학자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 최초의 천문계산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643년 조선통신사 일행 462명 가운데 네 번째 고위직인 독축관(讀祝官)으로 일본에 갔다. 통신사 일행이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일본 교토[京都]의 천문학자인 오카노이[岡野井玄貞]가 열흘 동안 그를 찾아와 역법을 배워갔다.

그리고 그의 제자인 시부카와[澁川春海]는 이 지식을 바탕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일본에 맞는 최초의 역법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이 1683년 채용된 ‘정향력(貞享曆)’이다. 이 사실은 이 천문학자의 전기인 『춘해실기』에 기록되어 일본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일본에는 박안기의 유적이 상당히 남아 있는데, 시즈오카현[靜岡縣]시미즈시[淸水市]의 세이켄사[淸見寺]에는 그가 써준 현판 ‘瓊瑤世界(경요세계)’가 2층 종루에 걸려 있고, 이 절의 경치를 노래한 친필 시도 남아 있으며, 그의 글은 일본의 다른 곳에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도쿠가와[德川家康]의 스승이었고 당시 일본 최고의 유학자인 하야시[林羅山]가 그를 초청해 나눈 대화가 그의 문집에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대부분의 사전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이들 일본 역사책에 대개 용나산(容螺山)으로 잘못 표기된 경우가 많다. 『일본역사대사전』·『일본인명대사전』 등에도 모두 용나산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940년 처음 발표된 시부카와의 연구서에 그의 이름이 조선의 용나산이라 잘못 인쇄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조선의 손님 나산(朝鮮の客螺山)’이라 쓰여진 것이 1940년의 연구서에서부터 ‘조선의 용나산(朝鮮の容螺山)’으로 잘못되기 시작하여 대부분의 일본 문헌이 용나산을 그의 이름인 듯이 쓰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인의 과학정신』(박성래, 평민사, 1993)
『羅山林先生文集』(平安考古學會,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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