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도사교(都司敎: 敎主) 나철(羅喆)이 민족을 위하여 일본정부 요로와 담판하고자 일본 동경(東京)에 가 있을 때인 1908년 12월 5일 아침, 한 노인이 숙소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단군교포명서」 1부와 『고본신가집(古本神歌集)』 및 입교절차서 등을 주면서 말했다.
“나의 이름은 두일백(杜一白)인데 나이는 69세이며, 동지 등 32인과 함께 백봉신사(白峯神師)를 사사(師事)하였고, 1904년 10월 3일 백두산에서 회합하여 이 포명서를 발행한 것이니, 귀공의 금후의 사명은 이 포명서를 널리 펴는 일이오.”
그렇게 이르고 간 며칠 뒤인 12월 9일 밤, 그 노인이 다시 찾아와서 “국운은 이미 다하였는데 어찌 이 바쁜 시기에 쓸데없는 일로 다니시오? 곧 귀국하여 단군대황조(檀君大皇祖)의 교화를 펴시오. 이 한마디 부탁뿐이니, 빨리 조국으로 떠나시오.” 하고 당부하고 갔다.
나철은 두일백 노인의 권고야말로 한 수도인의 구국방안이라기보다는 반드시 한배검[檀君]의 거룩하신 사랑의 신화요, 묵시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마땅히 가져야 할 민족의식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과 국가재건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다음날로 귀국하였다.
그리하여 한배검의 교화를 널리 펴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인구세(濟人救世)의 대원(大願)을 이룩하고자 한배검에게 주야로 원도(願禱: 기도)한 끝에 대도포명(大道佈明)의 영계(靈契: 대종교에서 신자에게 자격을 주는 예절)를 받고, 1909년 음력 1월 15일 수십 명의 동지와 함께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祭天)의 대례를 행하여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함에 이르러 마침내 대종교가 중광되었다.
원래 중광 당시 교명이 단군교였으나, 1910년 8월 5일 대종교로 바뀌었다. 이는 ‘대종(大倧)’의 ‘대(大)’ 자는 유일이요 크다는 뜻이며, ‘종(倧)’ 자는 ‘인(人)의 종(宗)’, 즉 상고신인(上古神人)으로 우리의 한배검이신 단군성조를 뜻한다.
곧 ‘대종’은 ‘단군’이라는 명사가 있기 이전으로 소급하여, 개천입도의 조화(造化)·교화(敎化)·치화(治化)의 삼신을 병칭하는 까닭이었다. 이 「단군교포명서」는 1904년 음력 10월 3일 두일백 등 13인이 백두산에 있는 대숭전(大崇殿)에서 대종사(大宗師) 백봉과 함께 작성한 것이다.
그 내용은 “금일은 유아(惟我) 대황조단군성신(大皇祖檀君聖神)의 4237회 개극입도지경절야(開極立道之慶節也)라…….”라는 글로 시작하여, 단군 탄강의 역사, 단군교의 신앙유습, 단군교를 신봉하여야 할 이유 등을 설명하고, 우리 민족은 같은 민족으로서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우리 겨레가 하늘의 자손임을 강조하고, 단군교를 오로지 정성으로 믿고 받들어서 구교의 중광은 물론, 천만 형제자매가 복록을 누리게 되기를 호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