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

  • 종교·철학
  • 인물
  • 대한제국기
  • 현대
해방 이후 대한불교총연합회 이사장, 한민족총회결성준비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승려.
이칭
  • 본명이만업(李萬業)
인물/근현대 인물
  • 본관전주(全州)
  • 사망 연도1978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901년(고종 38)
  • 출생지경상북도 예천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이종익 (전 동국대학교, 불교학)
  • 최종수정 2026년 0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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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대의는 해방 이후 대한불교총연합회 이사장, 한민족총회결성준비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승려이다. 1901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17세에 목도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1919년 봄에 졸업하였다. 이후 오대산에서 수행을 시작했으며 1931년 출가하였다. 1945년 혜암의 법맥을 이어받은 후 선학원에서 『선가귀감』을 번역·간행하였다. 1954년 불교정화사업을 발기해 재가승 추방을 결의하였다. 조계종 내 다양한 임원을 비롯해 대한불교총연합회 이사장, 한민족총회결성준비위원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평생 불교정화운동에 헌신하다가 1978년 입적하였다.

정의

해방 이후 대한불교총연합회 이사장, 한민족총회결성준비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승려.

개설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 본명은 이만업(李萬業). 경상북도 예천 출생. 이병규(李柄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억순(李億順)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7세에 목도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1919년 봄에 졸업하였다.

이 때부터 인생의 근본문제에 골몰하다가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짓게 된 까닭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고, 4월에 집을 나와 오대산에 초암(草庵)을 짓고 한동안을 지냈다.

1920년부터는 강원도 · 함경도의 여러 지방에서 마을사람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독학하였다. 1931년 스승을 찾아 설악산으로 갔다가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에서 혜암(慧庵)을 만나 발심하고 출가하였다.

이 때부터 정암사의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기도하는 한편, 불경을 열람하고 참선도 배웠다. 1932년 10월 오대산 상원사(上院寺)의 한암(漢巖) 밑에서 동안거(冬安居)를 마쳤고, 1934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에서 만공(滿空)의 지도를 받은 뒤 표훈사(表訓寺) · 장안사(長安寺) 등에서 정진하였다.

1936년 7월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일봉(一峯)에게 비구계를 받았고 1937년부터 2년간 선학원(禪學院)에서 안거하였다. 1939년 도봉산 망월사(望月寺)로 옮겨 수도하다가 1940년 강화도 보문사(普門寺)에서 업장소멸(業障消滅) 및 조국광복 기원 백일기도를 하였다.

1941년 계룡산 갑사(甲寺)에서 백일기도하였으며, 1942년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에서 백일기도를 한 뒤 백담사(百潭寺)에서 안거하였다. 1943년 전국의 여러 사찰을 순례하다가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백련암(白蓮庵) 선원에서 수도하였고, 1944년 범어사와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서 동산(東山)과 함께 수도하였다.

1945년 수덕사에서 정진하다가 혜암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그 뒤, 선학원으로 옮겨서 서산(西山)대사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의 번역 · 간행사업에 착수하여 3년만에 3,000부를 간행, 반포하였다.

1949년 1월 대한민국 육군본부 장충사(奬忠祠)를 맡아 관리하다가 장충단공원 및 국립묘지의 신설을 건의하였으며, 그 뜻이 받아들여지자 사장(祠長)의 직책을 사임하였다. 6·25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9·28수복 후 직지사(直指寺) 주지가 되었다.

1954년 불교정화사업을 발기하여 8월 24일 선학원에서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를 열고 재가승을 사원에서 추방할 것을 결의하였다. 같은 해 화계사(華溪寺) 주지가 되었고 이듬해 대처승의 본부인 조계사(曹溪寺)를 점거하고 주지가 되었다.

1956년 경기도 종무원장, 1957년 계룡산 갑사(甲寺) 주지, 1958년 조계종총무원 총무부장, 1959년 법주사(法住寺) 주지 겸 충청북도 종무부장, 1960년 조계종감찰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 문교부장관에게 조계종 재건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설립을 건의하여 1962년 4월 통일종단(統一宗團)의 형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 뒤 밀양 무봉사(舞鳳寺) 주지, 대전 심광선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7년 선학원 이사, 1969년 불교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가 되었다. 1970년 대한인민계몽회 총재로 취임하였고, 1971년 조계종 장로, 1972년 대한불교총연합회 이사장, 1974년 한민족총회결성준비위원회 부회장이 되었다.

어디에서나 설법하여 사람들을 교화하였고, 70세가 넘도록 매일 새벽 108배의 참회예불을 중단하지 않았다. 특히 불교정화운동의 선두가 되어 10여 년 동안 정화운동에 헌신하였으며, 신도나 청소년을 대할 때마다 신의와 효도를 강조하여 도의재건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1978년 6월 2일 매일 쓰던 일기를 쓴 뒤 입적하였다. 영결식은 조계종 장로원장(長老院葬)으로 조계사에서 가졌으며, 예산 수덕사(修德寺)에서 다비하였다.

참고문헌

  • 단행본

  • - 『대의대종사전집』(건양문화사,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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