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수리관개농업의 초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나라 이름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을 의성의 속현(屬縣)인 단밀로 비정하여 여기에 있는 저수지의 우리말인 ‘물뚝’·‘물동’을 한자로 미동(彌凍)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우리 나라의 벼농사는 청동기시대에서 그 기원이 밝혀지고 있으나, 커다란 저수지를 축조하는 데 노동력을 대규모로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발전은 초기 철기시대인 서력기원 전후 시기에 가능했다고 믿어진다. 이 시기에 유명한 상주 공검지(恭儉池), 김제 벽골제(碧骨堤), 밀양 수산제(守山堤), 제천 의림지(義林池) 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의성 대제지는 지금은 거의 형체를 알 수 없도록 잊혀져 가고 있다. 경상도지역에는 15세기까지 곳곳에 많은 관개용 저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제(大堤)란 그 가운데서도 규모가 큰 것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당시의 여러 제언(堤堰:댐)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 규모가 표시되지 않은 제언으로는 대구의 성당(聖堂)·불상(佛上)·둔동(屯洞)·부제(釜堤), 성주의 동정자제(東亭子堤)·소비곡제(所非谷堤)·극지제(極只堤)·죽제(竹堤)·소리제(所里堤)·사라제(沙羅堤) 등이 있다. 의성 대제지가 15세기의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미 이때까지는 메워져서 경작지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