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鄭逑, 1543~1620)는 1586년부터 약 3년간 함안군수로 재직하면서 문인 양성을 비롯해 읍지인 『함주지(咸州誌)』 편찬, 사당 건립, 지역 인사와의 교유 등 교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에 지역민들은 송덕비를 세워 그의 선정에 보답을 했다. 정구는 함안 지역의 학문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고,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는 토대를 마련해 준 인물로 평가된다.
함안에는 정구의 문인 12명이 거주했는데, 그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1672년 여항산(艅航山) 북쪽에 서원을 설립해 위패를 봉안했다. 그 과정에서 이현일의 고제인 안동의 김성탁(金聖鐸, 1684~1747)과 서원의 건물 규모와 배치를 협의했다.
1722년(경종 2) 향유(鄕儒) 조경식(趙景栻)의 주도로 별묘를 설치해 정구와 교유한 향현(鄕賢) 이칭(李偁, 15351600)・ 이정(李瀞, 15411613)・ 박제인(朴齊仁, 1536~1618)을 추향해 향촌의 중심 기구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긍익(李肯翊)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사액을 받았다는 기록이 보이나,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지지 않아 그 여부가 확실치는 않다. 서원의 운영은 대체로 성산 이씨 가계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여느 서원처럼 도림서원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훼철된 직후 생원 이수형(李壽瀅, 1837~1908)이 이를 수리해 서당으로 만들려 했으나, 군수의 무고(誣告)로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유배형을 당하였다. 현재 서원은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며, 터에는 1934년에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다. 유허비문은 정구의 14대손 정종호(鄭宗鎬)가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