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권 성립의 배경은 신분제도의 붕괴과정에서 소작농의 지위향상과 화폐경제의 발달로 인한 지주와 소작인의 경제적 계약관계의 형성을 들 수 있다. 도지권은 전국 각지에 분포되었으므로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 평안북도 의주군과 용천군 일대에서는 원도지(原賭地), 평안남도 대동군·강서군·중화군 일대에서는 전도지(轉賭地) 또는 굴도지(屈賭地), 황해도 봉산군·신천군·재령군·안악군 일대에서는 중도지 또는 영세(永稅), 전주와 정읍에서는 화리(禾利, 또는 花利), 진주와 고성에서는 병경(並耕)이라고 불렀다.
도지권을 ‘도지’라고도 하였는데, 도지의 말뜻에는 정조법(正租法)과 집조법(執租法)이 분화되기 이전의 소작료 징수방법, 도조(賭租)와 동일한 의미로 소작료 또는 정액소작료, 그리고 도지권이 포함되어 있다. 도지권을 가진 소작농은 그 소작지를 영구히 경작할 수 있었고 지주의 승낙이 없어도 도지권을 임의로 타인에게 매매, 양도, 저당, 상속할 수 있었다.
또한 도지권이 성립된 토지의 소작료율은 수확물의 약 25∼33%에 불과하였다. 그러므로 도지권을 얻은 소작농은 소작지를 다른 소작인에게 전대(轉貸)해 주고 일반 소작료를 받아 지주에게 자신이 납부해야 할 소작료를 제외한 다음 그 차액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것을 중도지(中賭地)라 하고, 원래 소작인을 중답주(中畓主)라 하였다. 특히 궁방전(宮房田)에 많이 존재하였다.
지주가 이러한 사실을 알더라도 그것은 소작인의 당연한 권리행사이기 때문에 간섭하지 못하였다. 지주가 도지권을 소멸시키거나 다른 소작인에게 이작(移作)시키려고 할 때는 소작인의 동의를 구하고 상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하였다. 도지권을 가진 소작인이 소작료를 납부하지 않는 극단적인 경우에는 지주가 소작농의 동의를 얻은 뒤 도지권을 팔아 소작료를 변제하고 나머지는 소작농에게 반환하였다.
이 도지권은 조선 후기에 전국 각지에서 성립되어 대한제국 때 크게 성행하였다가 1920년대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소멸되었다. 도지권의 발생은 황무지 개간, 토질 변경, 둑과 제방의 축조, 토지 매입 등의 사업에서 소작농도 지주와 함께 자본이나 노동력을 공동 분담하였을 경우이다. 또한 궁방전이 본래 민전(民田)에 설치되었을 경우와 소작인이 어떠한 노동이나 자본을 투입하지 않고 소작지에 대하여 일정한 권리를 도지권의 형태로 성립시켰을 경우에도 도지권은 발생하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농민들의 끊임없는 저항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도지권의 성장과 분포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일부지방의 특이한 소작관행이 아니라 조선 후기의 커다란 사회변동과 관련된 소작농의 토지에 대한 권리의 새로운 변화의 한 단면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학자들은 도지권을 소작권의 일종으로 영소작권(永小作權)으로 해석하였다.
그 근거는 도지권이 발생한 소작지에서 가장 큰 특징이 소작농의 소작기간의 장기화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학자들은 도지권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그것을 영소작권으로부터 한단계 더 성장한 하급소유권, 또는 부분소유권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 논거는, 첫째 도지권의 매매가격이 토지 총가격의 3분의 1에 달하고 지주의 소유권 가격의 2분의 1에 달하는 높은 가격이다. 이 높은 가격은 소작권의 매매가격으로는 합리성이 없고, 부분소유권의 매매가격으로 설명할 때 합리성이 있으며, 도지권 매매는 소유권 매매와 전적으로 같은 양식으로 행하여졌다는 점, 둘째 도지권이 발생하지 않은 소작지에서도 소작기간은 관습적으로 장기이며, 또한 소작권이 안정되어 소작권만으로는 그러한 비싼 권리가 매매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셋째 소작료율이 저렴하다는 점, 넷째 소작농의 도지권이 전대될 때 도지권은 언제나 소작료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가 되니, 이는 곧 소유권의 특성이라는 점, 다섯째 당시 농민들이 도지권을 영소작권만으로서가 아니라 소유권으로 의식하였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따라서, 8·15광복 이후의 해석에 의하면 영소작권은 도지권이 가지고 있는 소유권의 성격에 부수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지권이 가지고 있는 소유권이 비록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것이라도 관습상의 경작권을 보호하여 그것을 영소작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작농은 도지권을 방매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한 소작지에서 추방당하지 않게 된다.
도지권의 부분소유권으로의 성장은 배타적인 완전한 소유권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토지에 대한 지주의 소유권을 축소시켜 불완전하게 만들고 전체 토지소유권의 3분의 1까지는 성장하였다. 이러한 도지권의 소유권적 성장은, 소작농이 전근대적인 속박을 해체하고 자기의 소작지에 농민적 토지소유를 성립시켜나가는 과정이었다.
이것은 조선 후기, 특히 말기에 소작농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농민으로 상승하려는 근대로의 자생적 발전의 운동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새로운 사실이다. 도지권은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에 의하여 그 권리가 부정되면서 급격히 소멸하게 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은 토지에 대하여 일물일주(一物一主)의 원칙만을 인정하고 소유권자의 신고를 다시 법으로 인정해 주는 신고주의(申告主義)의 방법을 채택하였다.
소작농의 부분소유권이 존재하는 곳에서 기계적으로 적용된 신고주의는 약육강식의 원리이었다. 당시 소작농의 도지권은 토지 총가격의 3분의 1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신고주의에 의하여 절대적 사유권으로 법인받은 것은 3분의 2를 소유한 지주의 소유권이었다. 그리고 부분적 소유권으로서의 소작농의 도지권은 부인되고 대신 소작기간 20년 이상 50년 이내의 영소작권으로 인정되었다.
이것은 원래의 도지권의 성격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으므로 도지권을 소유한 소작농들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도지권 확인소송, 소작료 태납운동, 결의문 및 진정서 제출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도지조합을 결성하고 조직적인 활동을 펴나갔다. 특히 도지조합은 처음에는 이·동 단위를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나 보다 효과적이고 강력한 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몇 개의 이·동 도지조합이 모여 ‘연합도지조합’을 만들었다.
소작농들이 도지조합이라는 근대적 결사체를 조직하여 도지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도지권을 소유한 소작농의 근대적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지권 수호운동은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종결된 뒤 도지권은 급격히 소멸하여 1930년대에는 겨우 그 자취만 남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도지권의 소멸은 우리 나라 소작농의 밑으로부터의 농민적 토지소유운동을 정책적으로 좌절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