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방송 ()

동아방송 개국 기념 공연
동아방송 개국 기념 공연
언론·방송
단체
1963년 서울에서 개국되었던 민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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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63년 서울에서 개국되었던 민영방송.
개설

동아일보사가 겸영(兼營)한 민간상업방송의 하나로서 통상 DBS(Dong A Broadcasting System)라 하였다. 1963년 4월 25일 우리나라에서 두번째의 민간상업방송으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에서 개국하였다. 호출부호 HLKJ, 주파수 1230KHz, 출력 10㎾. 1962년 12월 14일 첫 시험전파를 발사하고 1963년 1월 7일 상업방송으로 정식인가를 받아 4월 25일 오전 5시 30분을 기하여 개국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이 방송은 『동아일보』의 창간이념에 따라 그 사명을 깊이 자각하며, 언론의 자유와 편성의 자주성을 견지하고 방송의 권위와 공신력을 드높이며, 문화발전과 산업경제번영 및 사회순화에 기여하기 위해 방송한다고 밝히면서, 그 주지(主旨)로 “건전·공평·명랑을 지향하며 방송의 품격을 높이고, 알기 쉽고 올바른 말의 보급과 사회 순화에 힘쓰며, 자유와 정의편에 서며, 어떠한 독재에도 반대한다.”고 내세웠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일간신문사가 방송을 겸영함으로써 인쇄매체와 전파매체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개국 당시 1일 방송시간은 14시간이었으나, 1963년 5월 20일부터 방송시간을 오전 5시부터 자정까지 19시간으로 연장하였다. 초창기의 프로그램 편성은 보도 10.9%, 교육·교양 14.5%, 생활정보 2.2%, 방송극 15.0%, 음악 39.3%, 오락 9.3%, 기타 2%로 되어 있었다.

1964년 6월 4일 계엄선포와 동시에 사회제반현상을 희화적(戱畫的)으로 비평하는 사회만평 프로그램 「앵무새」가 문제가 되어 중단되기도 하였다.

1964년 9월 19일부터는 국내 최초의 위성스튜디오 ‘DBS 미도파스튜디오’를 개설하여 「음악의 산책」·「경음악의 벤치」·「행운의 리퀘스트」·「5시 반의 데이트」 등을 방송하다가 1967년 1월 17일에 폐지되었다.

1964년에는 ‘걸어서 가자’라는 방송 캠페인을 실시하여 교통난의 해소와 버스업자의 횡포에 대항하고 시민의 건강향상을 도모함으로써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캠페인 프로그램의 효시를 이루었다.

1965년 9월에는 청취자의 의견을 수집하고 방송관계 문제를 연구할 목적으로 연구지인 『월간 리포트』를 창간하였으며, 후에 명칭을 『조사연구』로 바꾸어 몇 차례 휴간이 있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발간하였다.

또한, 민요를 현대화하고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늴리리 보급운동’을 전개하여 1967년 3월까지 약 1천여 곡의 노래를 편곡, 보급한 바 있다.

이 캠페인은 우리 가요계에도 영향을 미쳐 「늴리리」가 민요조 가요로서 계속 발전, 보급되는 데 기여하였다. 1966년 1월 25일을 기하여 새벽 1시 30분부터 30분간 북한동포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인 「서울의 애인」을 편성 방송함으로써 민간방송으로서는 최초의 대북방송을 실시하였다.

또한 대북방송과 심야방송 시행으로, 방송시간이 오전 5시부터 다음날 2시까지 하루 21시간으로 증가되었다. 1966년 12월 4일에는 주파수를 1230KHz에서 790KHz로 변경하였으며, 1967년 11월 6일에는 기본방송의 순서를 대폭 개편하여 그 동안의 상업성향을 탈피하여 보도프로그램 및 음악교양프로그램을 강화하는 등 민족의 방송으로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1968년 2월 6일 송신소 150㎾ 출력의 발전기시험을 했으며 3월 26일에는 무선국 변경허가를 얻었고, 4월 25일 출력을 10㎾에서 50㎾로 증강시켰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는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선언’과 이와 관련된 광고 무더기 해약사태가 발생하여 심한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1978년 11월 23일 국제전기통신연합(ITU)의 결정에 따른 중파대(中波帶) 주파수 재배정으로 주파수를 792KHz로 변경하게 되었다.

가청지역은 서울과 경기도·강원도 및 충청남북도 일부였다. 프로그램 편성비율은 보도 21.8%, 오락 37.5%, 교양 35.6%, 광고 5.0%, 기타 0.1%였다.

그 뒤 1980년 11월 14일, 당시의 상업방송체제를 공영방송체제로 전환시킴에 따라 같은 해 12월 1일한국방송공사(韓國放送公社)에 흡수되어 KBS 제4라디오인 ‘라디오 서울’로 개편되었다.

이 방송은 『동아일보』와 함께, 또는 개별적으로 많은 행사를 주관, 후원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국여자연식정구대회·전국남녀학생수영대회·동아마라톤대회·황금사자기쟁탈 전국지구별초청 고교야구쟁패전·전국여자테니스대회·전국국민학교배구대회·대통령기쟁탈 전국대학야구대회·4·19기념 동아사이클대회·백곰기쟁탈 전국국민학교빙상경기대회·명창명인대회·동아음악콩쿠르·동아무용콩쿠르·동아연극상·동아미술제·노대가회고전 및 화집 발간·전국남녀학생휘호대회·동아공예동우회원전·동아국제사진살롱·국수전·아마추어국수전·국제학술회의·어린이날대잔치·어린이탐조회(探鳥會)·각도 3·1운동기념비 건립 등을 들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그 동안 동아방송이 이룩한 업적은 다양한 프로그램의 개발, 즉 한국 방송사상 최초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전성기를 구축했으며 생활정보 프로그램, 종합잡지 형식의 종합구성 프로그램, 적극적인 청취자 참여 프로그램 및 사회만평 프로그램의 개발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또한, 정규 프로그램 이외에 방송전체를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라디오캠페인 기획을 시도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연감』(한국연감사, 1964∼1980)
『합동연감』(합동통신사, 1964∼1980)
『한국방송사』(한국방송공사, 1977)
『연합연감』(연합통신사, 1981)
『한국신문방송연감』(한국신문연구소, 1979∼1981)
『한국방송원론』(최창섭, 나남출판사, 1985)
『한국방송60년사』(한국방송공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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