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중인 1952년 4월 20일, 양우정(梁又正)이 대한통신사(大韓通信社)를 인수하여 부산시 광복동 1가 16번지에서 창립하였다. “진실을 신속·정확·공평하게 보도함으로써 민주적 민족문화 발전을 위해 언론보국(言論報國)에 기여한다.”는 기치 아래 1일 3편(便)을 발행하였다. 창간과 더불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웨스트렉스 텔레타이프(westrex teletype) 수신장치로 수신하고, 1일 9시간 30분에 걸쳐 지방송고를 함으로써 전국 통신망을 이룩하였다.
1953년 8월 편집국장 정국은(鄭國殷)이 연루된 ‘국제간첩단사건’이 발생하여 사장이 실형을 받는 수난을 겪었다. 그 해 11월 서울로 옮겨와 중구 남대문로 2가에 사옥을 정하고 체제를 개편하여 김성곤(金成坤)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 뒤 사장 김성곤의 노력으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통신사로 발전하였다.
UP통신과 외신계약을 한 다음 다시 NEA통신·UFS통신·VP통신·사이언스서비스(Science Service)통신·키스톤통신·공동통신(共同通信)·ANSA통신·TAP통신·CNA통신·뉴욕타임스(New York Times)특신판과도 계속 계약을 체결하였다. 1954년 9월에는 일본 동경(東京)에 특파원을 두고, 1959년 3월에는 우리 나라 언론계에서 처음으로 미국 워싱턴에 상주특파원을 파견하였다.
1964년 3월 1일 주식회사를 비영리조직인 사단법인체로 재발족하였으며, 다음해 4월 5일 에는 종로구 세종로로 사옥을 옮겼다. 그러나 1968년 7월 24일 이른바 ‘군기누설필화사건’이 발생하여, 편집부장 이하 기자 여러 명이 구속되었다.
국제적 통신사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1969년 9월에는 해외부를 창설하였고, 12월에는 도봉구 창동에 전용송신소를 건설하였다. 다음해 2월 2일에는 해외송신을 개시하였고, 1972년 4월에는 16-S휴대용 사진전송기를 도입하여, 8월 29일 남북적십자사 제1차회담 때에는 평양 현지에서 북녘의 모습을 전송하는 데 성공하였다.
1973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로 서울∼홍콩 간의 우주회선을 개통하여 공중상태에 관계없이 24시간 수신이 가능하게 되었다. 같은 해 4월 에는 김성곤이 회장으로 임명되고 홍승희(洪升熹)가 사장에 취임하였으며 사옥을 종로구 청진동으로 옮겼다.
1974년 2월에는 전전자식(全電子式) 엑스텔 프린터(extel printer)를 도입하고, 유선송신방식에 의한 M-150 한글모아쓰기 고속텔레타이프 설치공사를 마치는 등, 통신시설의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송신선도 개통시켜 동남아시아 계약사까지 통신망을 넓혀 나갔다.
조직으로는 편집국·국제국·전무국·총무국을 두었으며, 미국의 워싱턴과 뉴욕 및 동경에 특파원을 상주시켰다. 그러나 정부의 통신사 통합조처로 1980년 12월 31일≪연합통신≫에 흡수, 폐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