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산 선사유적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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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산 선사유적지
둔산 선사유적지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 · 가락식토기 · 무문토기 관련 생활유적.
시도자연유산
지정 명칭
둔산선사유적지(屯山先史遺蹟地)
분류
유적건조물/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유적분포지/유적분포지
지정기관
대전광역시
종목
대전광역시 시도기념물(1992년 10월 28일 지정)
소재지
대전광역시 서구 대덕대로317번길 9 (월평동, 둔산선사유적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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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전광역시 서구에 있는 석기시대 이후 집터 · 가락식토기 · 무문토기 관련 생활유적.
내용

1992년 대전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둔산동 일대의 지형은 두 개의 작은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펼쳐진 넓은 들판(35∼40m)을 끼고 20∼30m 높이의 얕은 야산(5∼60㎝)들이 펼쳐져 있다.

유적을 중심으로 2∼3㎞ 범위의 지형을 보면, 현재의 물흐름은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성천(省川)과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유등천(柳等川)과 대전천(大田川)이 합류해 갑천(甲川)을 이루고, 다시 이 물줄기가 북으로 13㎞ 정도 흘러가서 금강(錦江)과 합류하고 있다.

이 둔산동 유적은 신시가지 개발로 인해 1991년 5∼9월에 걸쳐 긴급 구제발굴되었다. 그 결과, 정상부분에서는 청동기시대 집자리 3개소, 그 동쪽에서 구석기유적 1개소, 북쪽의 낮은 언덕에서 신석기시대 집자리 15개소가 확인되었다.

구석기시대 유적은 표고 50m의 동쪽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유적의 성격은 알 수 없으나 홍적세 퇴적층인 염토층(鹽土層)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자갈돌, 판자돌 같은 자연유물과 몸돌, 격지, 망치돌 등 50여 점의 석기와 석기를 만들 때 나오는 작은 부스러기들(2㎝보다 작은 크기)이 있다.

자갈돌들은 크기 30㎝가 넘는 호박돌들이 많고 5∼10㎝ 크기의 주먹만한 돌도 가끔씩 보이는데 별다른 구조물을 이루고 있지는 않았다.

석재(石材)는 주로 차돌을 사용하였고, 그 밖에 석기제작에는 반암과 편마암, 사암, 변성암들을 사용하였다. 석기의 연대는 일부 유물의 형태와 격지 떼어내기 수법으로 보아, 후기 구석기시대의 이른 시기이거나 중기 구석기시대의 늦은 시기로 보여진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표고 50m의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은 작은 집자리와 성격을 알 수 없는 수혈 유구(竪穴遺構) 15기가 조사되었다. 직경은 2∼3m 내외이고, 깊이는 80∼130㎝ 정도이다.

이 수혈 유구들은 수혈 내부에 노지(爐址)와 같은 난방용 시설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계절적인 사용과 연관이 있으며, 적어도 겨울철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물 중 빗살무늬토기편은 어골(魚骨)무늬, 선조(線條)무늬 외 다양한 무늬가 있으며 바닥은 예외없이 둥근 바닥이다. 태토는 운모(雲母)와 석영(石英)이 섞여 있는 모래질도 있으나 청동기시대의 민무늬토기 같은 점토질도 있다.

이들 토기의 대부분은 배식용 또는 조리용으로 쓰였을 중소형이고, 저장용으로 볼 수 있는 대형 토기는 극히 드물다.

토기 외의 출토유물로는 농경에 썼던 보습 1점, 곡식 가공에 사용한 갈돌파편 2점, 고기잡이 그물에 달았던 어망추(漁網錘) 3점, 석재(石材) 다수, 석기반제품 1점, 타원형 석재 10점 등이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신석기시대 중기 후반에서 후기 초반에 해당하는 서기전 3000∼2500년으로 비정된다. 이 유적을 점유하고 살았던 집단의 규모는 15∼20명 정도의 친족공동체(親族共同體) 단계로 추산된다. 생업경제(生業經濟)는 원시적인 농경과 채집이 혼합된 형태로 파악된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이 능선에서 가장 높은 정상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두께 약 10㎝ 내외의 표토층 아래 붉은 석비래층(石飛來層)을 파고 내려간 3기의 집자리 유적을 조사하였다.

제1호 집자리는 장축(長軸)이 동서방향에서 약간 남으로 기운 장방형(長方形)이며, 규모는 740㎝×420㎝, 깊이 150㎝이다. 서쪽에 치우쳐 장축방향으로 총 길이 130㎝의 장방형 화덕이 이중으로 덧대어 놓여 있다.

제2호 집자리는 장축이 동서방향에서 약간 북으로 기운 장방형이다. 규모는 680㎝×570㎝, 깊이 50㎝로 제1호에 비해 바닥이 얕다. 내부의 바닥에 동서방향으로 각각 3개씩 2열의 초석(礎石)을 놓았다.

제3호 집자리는 장축이 동서방향인 부정형(不定形)이다. 동쪽이 경사져 있어 많은 부분이 깎여 나갔다. 현재의 크기는 길이 490㎝, 폭 340㎝이고, 깊이는 20㎝ 정도의 퇴적층만 남아 있다. 화덕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출토유물로는 가락식토기편(제2호)을 비롯해 기형을 알 수 없는 민무늬토기편 다수(제1호), 토제관옥편 2점(제3호), 토제방추차 1점(제3호), 양환석부 2점(제1호), 석부파편 1점(제1호), 부채꼴석부(石斧) 1점(제1호), 삼각만입형석촉 1점(제2호), 석검손잡이파편 1점(제2호), 석검편(끝) 1점(제1호), 석촉반제품 2점(제1호), 석기반제품 2점(제3호), 석기재료 2점(제3호), 숫돌편 1점(제3호) 등이 있다.

이 유적의 연대는 특징적인 가락식토기의 존재로 보아, 기원전 800년 전후로 비정된다. 현재 이 유적은 도시개발로 인해 원래의 지형이 상당히 훼손되어 일부를 이전·정비해 보존하고 있다.

참고문헌

『둔산선사유적발굴조사보고서』(충남대학교박물관,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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