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놀이 연희자들은 궁중천역(宮中賤役)에 종사하던 편놈(伻人)들로서 서울 성문 밖에 살았다.
그러나 인조 때 이후 공의(公儀)로서의 산대연희가 폐지되자 이들은 분산하여 제각기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이 단체(契)를 모으고 각각 경향 각지를 순연(巡演)한 결과 애오개(阿峴)산대·녹번(碌磻)산대·사직(社稷)골 딱딱이패 등이 생겼다고 한다.
이들을 본산대(本山臺)라고 부르지만 오늘날 그 본산대는 전해 오지 않고, 사직골 딱딱이패의 본산대를 본뜬 양주별산대(楊州別山臺)놀이만이 전하여 온다. 사직골 딱딱이패는 백정·상두꾼·건달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양주골에서는 약 200년 전부터 해마다 주로 4월초파일과 5월 단오에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산대놀이를 놀게 하였는데, 그들은 지방순례 등으로 공연약속을 어기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불편을 느낀 나머지 양주골에서 신명이 과한 자들이 모여 딱딱이패를 본떠 가면과 의상 등을 제작하고 공연했는데, 성공을 거두자 그 이후부터 발전시켜 내려온 것이 양주별산대놀이라고 일러온다.
딱딱이패는 본산대가 전하지 않는 오늘날, 양주별산대놀이라는 분파를 형성시켰다는 점에서 연극사적 의의가 있다. →양주별산대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