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산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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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1335번지 일대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국가의 주요 역사 기록물을 보관 · 관리하던 서고(書庫).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마니산사고는 실록을 비롯한 국가 주요 사적을 보관하던 강화도의 외사고(外史庫)이다. 임진왜란 이후 새롭게 제작된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4곳의 외사고 설치가 추진됨에 따라 강화도 마니산 기슭에 사고가 신설되어 실록의 원본을 보관하였던 것으로 설명되어 왔다. 다만, 최근의 연구를 통해 마니산사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부실하다는 사실이 지적됨에 따라, 정족산사고가 설치되기 이전까지 강화도의 사고는 강화부 내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학설이 제시되었다.

목차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1335번지 일대에 설치되어 조선시대 국가의 주요 역사 기록물을 보관 · 관리하던 서고(書庫).
내용

본래 강화부 봉선전(奉先殿) 서쪽에 있던 사고(史庫)를 1606년(선조 39) 마니산 기슭 덕포리로 옮겨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니산사고가 설치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593년 7월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해 내장산의 암자에 보관되고 있던 전주사고본 실록을 접수한 조정은 이를 『선원보(璿源譜)』 등의 자료와 함께 해주로 옮겨 보관하였다. 이듬해 7월 국왕이 피난했던 의주 행재소 인근의 영변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에 설치한 임시 사고로 이안하였으며, 전란이 마무리된 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 보관하였다.

1603년(선조 36) 7월 실록의 재간행이 추진됨에 따라 실록을 강화부 봉선전 서쪽에 설치된 사고로 옮긴 후 실록 재인쇄 작업이 끝나는 1606년 4월까지 이곳에 보관하였다. 이후 새롭게 제작된 정본 실록 3질과 교정쇄본 1질, 그리고 전주사고본 원본 1질 등 도합 5질본(五秩本)을 나누어 보관하기 위해 서울 춘추관사고 외에 4곳의 외사고(外史庫) 설치가 추진되었으며, 이때 마니산사고가 신설되어 실록 원본을 보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부 내에 있던 사고를 마니산사고로 옮긴 시기는 1606년 혹은 그 직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다만, 마니산사고를 신축했다는 문헌 기록이 확인되지 않으며, 마니산의 재궁(齋宮)이 낮은 곳에 위치해 있어 옮길 곳을 찾아보도록 명하였다는 기록의 존재를 고려하여, 전란 직후 재정의 궁핍으로 인해 사고 건물을 새로 짓는 대신 마니산 기슭의 덕포리 서재곡(書齋谷)에 있던 기존의 재궁 건물을 사고로 활용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1653년(효종 4) 11월 마니산사고 사각(史閣)에서 화재가 발생함에 따라 이곳에 보관 중이던 많은 서적과 서궤가 소실되었다. 이후 정족산성(鼎足山城) 내에 사고를 새로 짓고 실록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함에 따라 마니산사고의 기능은 정족산사고로 이전되었다. 현재에도 마니산사고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덕포리 서재곡 재궁 터에는 돌담과 초석 등이 남아 있다.

마니산사고의 치폐연혁(置廢沿革)에 대한 위와 같은 설명은 1960년대에 처음으로 제시된 이래 장기간 정설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를 통해 임진왜란 이후 강화도에 마니산사고가 설치되었다는 통설이 재고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마니산사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문헌적 근거는 임진왜란 이후 재간행된 『명종실록』 「부록」의 기사 외에는 확인되지 않으며, 조선 후기에 편찬된 강화부 읍지(邑誌)에도 마니산사고와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덕포리 서재곡의 재궁 터를 사고가 있던 자리로 확정할 만한 고고학적 근거 역시 제시되지 못한 상태임이 지적되었다.

반면, 1606년(선조 39) 제정된 「경외사고수직절목(京外史庫守直節目)」및 효종 · 현종 대에 작성된 『 승정원일기』에는 강화부의 사고가 정족산으로 이건되기 이전까지 읍내에 존재하였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으며, 병자호란 당시 주로 강화읍성 일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이는 청나라 군사에 의해 실록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 또한 실록이 마니산이 아닌 강화부 내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었음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정족산사고가 설치되기 이전까지 마니산사고에서 실록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기존의 통설은 재고의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와 같은 최신 연구 동향을 감안하였을 때, 향후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실록봉안형지안(實錄奉安形止案)』 · 『실록포쇄형지안(實錄曝曬形止案)』 및 읍지류 자료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마니산사고의 존재 여부에 대한 정밀한 학술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원전

『선조실록』
『인조실록』
『효종실록』
『숙종실록』
『강화부사고포쇄형지안(江華府史庫曝曬形止案)』
『사고지조사보고서』(국사편찬위원회, 1986)

논문

강문식, 「『조선왕조실록』 연구의 통설 재검토 - 실록 편찬 단계 및 ‘마니산사고설’을 중심으로」 (『규장각』 49,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김기태, 「조선사고(史庫)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 (『기전문화연구』 29-30, 기전문화연구소, 2003)
박대길, 「조선시대 사고관리의 변화」 (『국학연구』 14, 한국국학진흥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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