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관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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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 조선시대 서울의 춘추관에 설치했던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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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춘추관사고는 고려·조선시대 서울의 춘추관에 설치했던 사고이다. 고려 초기부터 춘추관에 내사고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화도로 천도할 때 춘추관의 실록도 함께 옮겼다. 개경으로 환도한 이후, 궁궐 안의 불당고(佛堂庫)에 보관하였다가 중서성에 춘추관을 설치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내사고를 중추원에 설치했는데 화재의 위험으로 상의원으로 옮겼다. 1405년 한양으로 천도하여 경복궁 근정전 서랑에 봉안하여 조선의 춘추관사고로 자리를 잡았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때에 불에 타서 복구하였으나 1811년 화재로 내사고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목차
정의
고려 · 조선시대 서울의 춘추관에 설치했던 사고.
내용

고려는 초기부터 춘추관에 내사고를 둔 것 같으나 언제부터 설치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고려에서는 춘추관에 보존해오던 역사 서적이 거란의 2차 침입이 있던 현종 초기에 거의 불타버려 다시 『칠대실록(七代實錄)』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이어 계속된 내란과 외침으로 춘추관에 보존한 실록을 비롯한 역사서적들이 여러 차례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 때에는 궁궐이 불타 춘추관의 실록도 소실의 위험이 컸는데, 마침 직사관(直史館)이던 김수자(金守雌)가 궁궐 안에서 숙직하다가 실록을 짊어지고 산호정(山呼亭)에 이르러 땅을 파고 감추어두었다. 이 때문에 국사(國史)가 전해질 수 있었고, 예주방어사(禮州防禦使)를 지낸 김수자는 뒤에 이부시랑한림시독학사지제고(吏部侍郎翰林侍讀學士知制誥)의 벼슬에 추증되었다.

몽고족의 침입으로 고려조정이 강화도로 옮겨가면서 1232년(고종 19) 6월 역대의 실록들을 비롯한 사적(史籍)도 강화도로 옮겨졌다. 1270년(원종11) 강화도에서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자 실록들도 개경으로 옮겨져 궁궐 안의 불당고(佛堂庫)에 보관되었다. 그 뒤 1274년(충렬왕 즉위년) 9월 제상궁(堤上宮)의 중서성(中書省)에 춘추관을 두고 실록을 이장(移藏)하였다. 1290년 11월 몽고족 내안적(乃顔賊)의 잔당들이 침입해 역대의 실록들이 다시 강화도에 옮겨졌다.

1292년 1월에는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로 옮겨졌다가, 1307년 몽고의 강요에 못 이겨 역대실록 모두를 원나라에 보내게 되었다. 원나라에 갔던 실록은 1312년(충선왕 4) 5월에 돌아왔으며, 1361년(공민왕 10) 11월에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고 국왕이 복주(福州)까지 피난했을 때 미처 대피시키지 못해 많은 손실을 입었다. 환도(還都)에 앞서 이인복(李仁復)을 보내 실록과 중요서적들을 수습했으나 불과 2할 정도만이 수습되었다.

1392년(태조 1) 7월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해 조선이 개창될 때도 내사고는 수창궁(壽昌宮)의 한 방에 사고로 존재하였다. 이곳에 보관된 실록은 그 뒤 1400년(정종 2) 10월 수창궁의 화재 때 불에 탈 위험이 있었으나 숙직하던 노이(盧異)의 노력으로 구출되어 중추원에 사고가 설치되었다. 다시 1402년(태종 2) 6월 임금의 음식을 취급하는 부엌과 가까워 화재의 위험이 높다 하여 상의원(尙衣院)으로 옮겨졌다.

그 뒤 개경의 내사고는 1405년 9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옮겨져 그 해 10월 경복궁 근정전(勤政殿) 서랑(西廊)에 봉안됨으로써 조선의 춘추관사고로 자리잡았다. 그 뒤 장생전(長生殿)으로 이장되었다가 1413년 5월 다시 사훈각(思勳閣)의 재궁(齋宮)에 두었다. 춘추관은 상서원(尙瑞院) 서쪽에 있었는데 따로 실록각(實錄閣)에 계속 봉안해오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졌다.

왜란이 끝난 뒤인 1603년(선조 36) 7월부터 실록의 재인(再印) 작업에 들어가 1606년 4월에 끝났다. 다시 인쇄된 4부와 전주사고본 1부를 합쳐 역대실록 각 5부를 수장하기 위해 5사고가 정비될 때 춘추관사고도 복구되었다. 이때는 아직 춘추관 건물이 재건되지 않아 병조에 두었다가 춘추관이 궁내에 설치된 뒤 옮겨졌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춘추관이 불탔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일부가 강화도로 소개(疎開)되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또다시 소개되면서 산실되었다. 그 뒤 춘추관사고는 1811년(순조 11) 윤3월에 화재로 말미암아 실록 72상자 중 66상자가 불타버려 내사고로서의 기능도 상실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
『정종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사고지조사보고서』(국사편찬위원회,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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