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이곳이 조선 왕실의 본관지이며, 이미 1410년(태종 10)에 태조의 어용(御容)이 경기전에 봉안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또 실록각(實錄閣)이 처음부터 마련되지 않아 실록들을 여러 차례 옮겨 보관하였다.
1445년(세종 27) 처음 전주에 실록들을 봉안할 때, 부(府)의 성안 승의사(僧義寺)에 두었다가 1464년(세조 10) 가을에 진남루(鎭南樓)로 이안(移安)하였다. 당시 세조는 전라도에 명해 실록각을 건립하도록 했으나, 연이은 흉년으로 공사를 시작하지 못하고 미루었다.
1472년(성종 3) 봄, 세조 · 예종 양조의 실록이 만들어지자 성종은 양성지(梁誠之)를 봉안사(奉安使)로 삼아 이를 전주사고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때 춘추관의 구신(舊臣)이었던 김지경(金之慶)이 이곳 관찰사로 나와 있으면서 애써 실록각을 건립하고자, 양성지와 더불어 경기전의 동편에 자리를 잡고 계(啓)를 올렸다.
이에 이웃 여러 포(浦)의 선군(船軍) 300명을 역군(役軍)으로, 전주부윤 조근(趙瑾)을 공역(工役) 책임자로, 순창군수 김극련(金克鍊)은 공사를 감독하도록 하여 1473년 5월을 지나 공사를 마쳤다. 실록각이 완성되자 그해 6월 진남루에 봉안하고 있던 실록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그 뒤 120년간 실록과 기타 서적이 잘 보관되어 내려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왜란이 끝난 뒤, 보현사의 전주사고본 실록을 다시 영변의 객사로 옮겨두었고, 1603년 5월에는 등서(謄書)와 재인(再印)의 편의를 위해 다시 강화도로 옮겼다. 임란 후, 전주사고본 실록과 이를 바탕으로 재 인쇄된 4질을 합한 5질의 실록을 봉안하기 위한 5사고가 정비되나 전주사고는 계승 복구되지 못하였다. →사고(史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