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그 시기를 정법(正法)·상법(像法)·말법(末法)의 3기로 분류하며, 이 3기 중 가장 문제시되는 때가 말법기라고 하여 말법사상에 대한 논란이 특히 많다.
정법기는 부처의 교법을 그대로 수행하여 쉽게 성과(聖果)를 성취하는 시기로, 정법기에 오도(悟道)하는 이가 특별히 많다고 하였다. 상법의 시기는 정법의 시기와 겉모습은 비슷하여 수행하는 이는 많지만 증과(證果)에 도달하는 이는 적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경전에서는 정법 시기를 석가모니 때부터 500년 또는 1000년의 기간으로 잡았고, 상법 시기를 정법이 끝난 뒤의 1000년으로 잡고 있다. 또 말법의 시기에는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떨어져서 수행하는 이는 적고, 불법(佛法)은 더욱 미미하고 쇠퇴해져서 사람들이 도를 닦기보다는 교만과 시비에 휩쓸리는 시기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나 중국불교에서는 정법과 상법의 시기가 끝난 뒤 1만 년 동안으로 보고 있다. 특히 수나라의 신행(信行)은 삼계교(三階敎)를 창도하여 정법은 제1계(階), 상법은 제2계, 말법은 제3계라고 주장한 뒤, 말법시대가 시작된 지금부터는 반드시 보법(普法)을 닦고 보행(普行)을 실천해야 됨을 강조하였다.
그는 보법보행의 교법으로서 ≪화엄경≫의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또 도작(道綽)과 선도(善導)는 말법시대에 맞는 수행법으로 참회와 염불(念佛)을 크게 강조하였다.
신행과 도작 등의 말법사상은 우리 나라에도 은근한 영향을 미쳤으나, 당시 우리 나라에는 불교교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신앙이 철저하던 시기였으므로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고려 초기에 법을 구하는 승려 36인이 송나라로 들어가서 연수(延壽)로부터 선정일여(禪淨一如)의 사상을 배워 온 뒤부터 말법사상에 기초를 둔 정토신앙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말법사상에 기초를 둔 정토사상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 깨달음을 이루어야 하는 선(禪)이나 보살도(菩薩道)는 난행도(難行道)에 속하는 것으로 말법의 중생이 그것을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주장을 편 뒤,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에 의지하여 쉽게 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염불수행을 하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에 따라 고려 초기 및 중기의 불교계에는 이러한 말법시대에는 정도(正道)가 땅에 떨어졌으니 정혜(定慧)를 닦기보다는 염불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흐름이 크게 확산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 고려 중기의 지눌(知訥)은 ≪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을 지어, 시대는 비록 변할지라도 심성(心性)은 변하지 않는 것이거늘 법과 도를 흥하고 쇠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대승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의 소견이라고 하였다. 지눌은 이 저서에서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말법을 핑계삼아 염불수행만을 취하는 그릇된 편견을 바로 고치고자 하였다.
또 그는 ≪원돈성불론 圓頓成佛論≫에서 ≪화엄경≫의 대의는 말세의 슬기로운 중생으로 하여금 나고 죽는 현실계에서 단박에 부처의 부동지(不動智)를 깨닫게 하는 데 있는 것임을 강조하여, 아무리 말법시대라 할지라도 슬기로운 중생은 부동지를 이룰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고려 말의 야운(野雲)은 ≪자경문 自警文≫에서, “오직 이 말법시대에는 성인이 가신 지 오래여서 마(魔)는 강하고 법은 약하며, 남을 옳게 지도하는 이는 적고 남을 그르치는 이는 많으며, 슬기로운 이는 드물고 어리석은 이는 많다.”고 하여 말법시대의 양상을 열거한 뒤, 그러나 스스로 도를 닦지 않는 것을 한탄할지언정 말세에 태어난 것을 근심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여 말법사상을 무시하였다.
이와 같은 선종의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전승되어 조선 중기의 휴정(休靜)은 “마군(魔軍)의 떼들이 말법시대에 불붙듯 일어나서 정법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참선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를 깊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염불을 강조하는 종파와 승려들은 말법시대를 염불을 권장하는 방편으로 삼아 선종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 말법사상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