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6일덕천(德川)의 천도교구 공선원(共宣員) 현성재(玄聖才)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맹산의 천도교 교구장 문병로(文炳魯)·김응철(金應哲)·방기창(方基昌)·정덕화(鄭德化)·김치송(金致松)·이관국(李寬國)·방진원(方鎭垣) 등 천도교의 여러 간부들에 의해 주동되어, 교인 50여 명이 가두로 진출,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다가 헌병의 출동으로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나 이 날부터 군내 각지에서 비슷한 규모와 같은 방식에 의한 만세시위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다가 3월 10일, 일제는 천도교인 1명을 만세시위운동 주동자라 하여 헌병주재소에 잡아다 가두고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 53명이 헌병주재소로 가서 체포자의 석방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일제측은 군중 53명을 모두 뜰 안에 들어오게 한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 박내준(朴來俊)·방윤격(方允格) 등 53명을 한편에 열지어 세운 뒤 한 사람씩 모조리 사살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50명이 그 자리에서 순국하고 3명만이 겨우 살아나왔다. 그러나 맹산의 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연일 산발적인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야만적 무력행사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순국하고 부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