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조상들은 생존에 필요하였던 적당량의 물량을 손쉽고도 정확하게 얻기 위하여 계량법(計量法)을 발명하여 사용해 왔다.
곡물이나 액체류와 같이 일정한 외형을 갖추지 못한 것은 표준용기에 담아서 정확한 물량계량을 하였고, 이와는 달리 일정한 외형을 지니고 있어 용기에 담아서는 진정한 물량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는 금속류나, 미소량(微少量)까지도 정확하게 판단하여야 하는 귀금속류나 약재류(藥材類) 같은 물품은 그 무게로써 계량하는 방법이 취해졌다.
무게를 계량하기 위해서, 또 누구에게나 동일량이 인정되게 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무게표준량이 정해져야 했는데, 우리 나라에는 선사시대부터 전해 오는 표준무게 단위로 칭(稱)이 있었으나, 뒷날 중국에서 통용되었던 표준량 단위인 1근중(斤重)이 도입되었다. 중국의 상고 때 1근중은 대략 256g 정도였으나, 전한(前漢·신(新) 때는 246g으로 감소되었다가 당나라 때는 다시 증가되어 668g이 되었다.
통일신라 때부터 세종 이후까지 우리 나라에서 통용된 1근의 무게는 642g이어서 당나라의 1근에 매우 가깝게 되어 있었는데, 옛날부터 전해온 칭의 무게는 소칭(小稱)은 1근 또는 3근, 중칭(中稱)은 7근 또는 30근, 대칭(大稱)은 100근이다. 중국에서도 상고 때 칭단위가 사용된 흔적을 하(夏)나라의 기록에서 볼 수 있으나, 그 무게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周)나라 때 북방족이 사용하고 있었던 무게단위로 칭(秤)이 있었는데, 그 무게는 춘추전국시대 때 중국의 무게 단위로 16.7근이어서 현재의 무게로 나타내면 대략 4,265g쯤 된다. 또한, 세종 때의 1근중을 기준하였을 때는 약 6.64근이 되어 7근에 가까워서, 중국 상고 때의 칭량 단위와 우리 나라 상고 때의 칭량 단위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에서의 칭단위는 하나라에서만 보일 뿐 주나라에서는 이미 근 단위가 통용되었다. 일부 북방족이 주나라제도와 병용했던 단위 중에서만 단일단위량을 볼 수 있는 데 비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5종이나 있으므로, 그것이 주나라 때 북방에서 도입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러한 무게 단위는 적어도 주나라 이전의 제도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 나라가 도량형제도를 통일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연대는 매우 오랜 옛날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