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를 건국한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의 적자(嫡子)로, 고왕 재위 시기 계루군왕(桂婁郡王)의 직위를 받았다. 719년 고왕이 죽고 발해의 제2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며, 당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을 받았다. 형제로는 대문예(大門藝), 대창발가(大昌勃價), 대호아(大胡雅), 대림(大琳), 대아랑(大郞雅) 등이 있다. 아들은 대도리행(大都利行), 대흠무(大欽茂), 대욱진(大勗進), 대번(大蕃) 등이다. 장인은 임아상(任雅相 또는 任雅)이며,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가 확인된다.
무왕은 719년 즉위한 뒤 실리외교를 취하면서 주변에 대한 영역 확장을 가속화하였다. 발해의 팽창은 당과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유착을 가져왔고, 이것이 다시 발해의 흑수 토벌과 대문예의 당 망명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발해의 대외정책과 활동은 북방민족의 정세 변화와도 긴밀하게 연동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730년대 전반에는 돌궐, 거란, 해 등 북방민족과의 반당(反唐) 연대 강화를 통해 당과 전쟁을 벌이기에 이른다.
당은 720년에 거란과 해를 공격하기 위해 처음으로 발해에 군사 동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협조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거란 · 해뿐 아니라 돌궐과의 전투에서 잇따라 패전하였다. 이후 거란과 해는 반당 강경파가 권력을 강화해 갔고, 돌궐은 세력을 다시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런 결과로 인해 발해가 당의 군사 동원 요청에 협조하지 않았던 것을, 당으로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당은 흑수말갈을 이용하여 발해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722년에 흑수말갈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처음으로 조공하자, 당은 그를 발주(勃州) 자사(刺史)로 책봉하였다. 726년에는 흑수말갈 추장에게 이헌성(李獻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흑수도독(黑水都督)으로 책봉하였으며, 흑수군(黑水軍)을 설치하고 장사(長史)의 관리 하에 두었다.
당의 이러한 정책은 흑수말갈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영향력 확대가 아닌 흑수말갈의 요청 내지 동조로 이뤄진 것이었다. 따라서 무왕은 당과의 무력 대결이 아닌 “흑수가 처음 우리의 길을 빌려 당과 통하였는데, 지금 당 관리를 청하면서 나에게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필시 당과 함께 앞뒤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고 하며, 동생 대문예와 장인 임아상에게 흑수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에 숙위(宿衛) 경험이 있었던 대문예가 반대하자, 무왕은 크게 노해 종형 대일하로 그를 대신하게 하고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무왕은 당나라에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청하였으나, 당나라가 거부하면서 발해와 당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아직 본격적인 분쟁을 원하지는 않았다. 대문예의 문제를 형제간의 일로 축소하여 다루며, 사신 왕래를 통한 외교적 교섭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한편, 726년에 시작되었던 흑수 토벌은 728년경에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다. 이때 당은 흑수도독 이헌성에게 흑수경략사(黑水經略使)를 제수하였다. 흑수경략사란 흑수 지역을 경략하는 사직이다. 흑수 중 일부가 발해에 복속되었거나 발해 편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당이 이를 경략하기 위해 이헌성에게 경략사직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곧바로 발해와 당의 분쟁에 또 하나의 변수가 발생한다.
728년 4월에 당에 숙위로 머물렀던 무왕의 적자 대도리행(大都利行)이 사망하면서, 왕위계승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무왕의 동모제(同母弟)였던 대문예가 당에 있는 상황에서의 후계문제는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였다. 그리고 730년 10월에 토번(吐蕃)이 당에 귀부(歸附)하자 당은 토번 전선의 안정을 기반으로, 요서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발해는 요서 지역의 거란을 돕기 위해 731년 마지막 견당사(遣唐使) 파견을 끝으로 대당 강경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732년 9월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죽였다. 무왕은 앞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727년 일본에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다. 발해가 등주를 공격하기 한 해 전인 731년 일본 병선 300척이 신라의 동변을 침입한 것은 그 성과로 보인다.
당나라는 발해의 등주 공격 이후 신라에게 군사 협력을 요청하였다. 나당연합군은 733년 겨울 무렵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격하였으나 추위와 폭설로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고 회군하였다. 그 사이 발해군은 733년 윤3월 거란‧돌궐과 함께 마도산(馬都山)을 공격하였는데, 『신당서(新唐書)』 오승자(烏承玼) 열전에는 발해군이 “성읍을 찢어 죽였다(屠城邑)”고 표현할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였다. 하지만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북방민족의 반당연대 활동은 약화 · 해체의 길로 나갔다.
반당 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게 된 당은 734년 거란의 가돌간(可突幹)과 경쟁관계에 있던 아관(牙官) 이과절(李過折)을 부추겨서, 가돌간과 그 무리를 죽이고 당에 투항하게 하였다. 반당연대의 중심축이었던 돌궐은 마침 비가가한(毗伽可汗)이 사망하면서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무렵 발해 내부에서는 반당 활동의 필요성이 해소되고 있었다. 대도리행 사망 후 발생한 후계문제는 지난 수년 간 대흠무〔 문왕〕)로의 후계 구도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당과의 전쟁은 발해 내부의 결속력과 무왕의 왕권 강화에 좋은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이후 당은 요서 지역을 완전히 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해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반당연대 세력의 이탈과 약화 속에서 발해가 반당 활동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당과 친선관계를 회복하였다.
이후 발해는 내부적으로 흑수말갈 등에 대한 정복과 체제 개편에 집중하게 되면서, 문왕대 황제국 체제를 확립하는 데 그 기틀을 다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