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식추보법가령(交食推步法假令)』의 본문 큰자(주해 중 · 소자 갑인자)와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의 본문 큰자, 세주의 특소자(주해 중 · 소자 갑인자)를 찍어내기 위하여 주조한 활자이며, 그 해의 간지(干支)를 붙여 이름한 것이다.
1457년 12월 24일 세조로부터 이순지(李純之)와 김석제(金石梯)가 세종 때 이루어진 『교식추보법』과 『산송(算誦)』에 가령(假令) 및 주해를 지어 붙이는 일을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명령을 받고 두 사람이 저술하였다. 임금의 수정을 받아 완성시킨 다음 서문을 마련한 것이 다음해 정월이었다.
그리고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친히 요해한 『역학계몽』을 최항(崔恒) · 김구(金鉤) · 한계희(韓繼禧) 등에게 교정, 보해시켜 1458년 7월 주자소로 하여금 찍어내게 하였는데, 그것이 다음달인 8월 문신과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널리 반사되었다.
이와 같이 무인자로 찍힌 두 책의 저작성립(著作成立)부터 인출까지의 사실로 보아 이 활자는 1458년 1월부터 7월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교식추보법』 및 『산법가시(算法歌詩)』는 그 서문에 ‘세종이 지은 것’이라 하였듯이 세종의 기여가 컸고, 세조도 친히 수정을 가하여 완성시킨 역법이기 때문에 ‘성(聖)으로써 성을 이어 이루어진 아름다운 책’으로 여겨 존중하였다. 그리고 『역학계몽요해』는 세조가 대군 때 몸소 지은 이른바 어제서(御製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무인자는 이 두 책을 찍어내기 위하여 특별히 계획, 주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주조 절차로는 먼저 『교식추보법가령』의 본문 인출에 필요한 큰 활자를 만들어 냈고, 이어 『역학계몽요해』의 본문과 가는 주의 인출에 필요한 큰 활자와 특소의 가는 활자를 더 만들어 냈다.
이 활자로 찍어낸 책 중 오직 『교식추보법가령』만을 보고 ‘교식추보대자(交食推步大字)’ 또는 ‘교식대자(交食大字)’라 이름붙인 이도 있다. 그렇게 명칭할 때 『역학계몽』의 본문과 가는 주를 찍기 위하여 주조한 활자의 부름이 문제가 될 것이다. 이 활자의 글자체는 송설체(松雪體)의 필의가 짙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이인영(李仁榮)은 세조가 쓴 글씨 같다고 하였는데, 그에 따라 ‘세조체자(世祖體字)’라 이름붙인 이도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무인자본으로는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교식추보법가령』 권상 · 하 1책, 이겸로(李謙魯) 소장의 『역학계몽요해』 권1·2 잔본 2책, 그리고 성암고서박물관 소장의 『역학계몽요해』 권4·5 잔본 2책이 있다.
이 무인자는 특정한 책을 찍어내기 위하여 주성되었기 때문에 그 인본이 드물게 전해지고 있어 매우 희귀한 인쇄문화자료로 평가된다.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