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암 ()

불교
인물
해방 이후 『불교대성전』, 『현공윤주일대법사설법집』, 『오경통해』 등을 저술한 승려.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5년(고종 32)
사망 연도
1969년
출생지
전라남도 강진
정의
해방 이후 『불교대성전』, 『현공윤주일대법사설법집』, 『오경통해』 등을 저술한 승려.
개설

이름은 윤주일(尹柱逸). 본관은 해남(海南).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는 윤상호(尹相浩)이며, 어머니는 배정선(裵貞先)이다. 4세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여 한시를 짓는 등 문재를 발휘하며 경서(經書)에 능통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2년 사립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 서울 인사동의 범어사(梵魚寺) 포교당에서 용성 진종(龍城震鍾)의 설법을 듣고 발심하여 불교에 귀의하였다.

용성·만해(萬海)·만공(滿空) 등의 설법을 자주 들으며, 만해의 민족의식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항일운동을 하다가 중앙학교를 퇴학당하였다.

1914년 일본에 건너가 다이쇼대학(大正大學)에서 불교학을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16년 22세에 대각사(大覺寺)에서 진종에게 출가하였다.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2년간 눕지 않고 용맹정진한 뒤, 1918년 유점사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용성·만해의 뜻을 받아 평양으로 옮겨 조만식(曺晩植) 등과 항일운동과 사회사업을 전개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포교단체인 평양불교청년회를 창립하여 간사장을 맡았고, 유점사 평양포교당을 설립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1920년 6월 조선불교청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1년 12월 조선불교유신회를 개최하여 ‘불교유신 8대강령’을 제시하였으며, 불교유신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선불교유신회를 창립하였다.

1925년부터는 평양에서 우리 나라 민간 최초의 정신박약아 시설인 자생원(慈生院)과 고아원을 설립하여 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장학회관·백선행기념관(白善行紀念館)도 설립하였다. 명성학교(明星學敎)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으며, 조선일보 평양지국장도 겸임하였다.

1947년평양영명사(永明寺)의 열반법회에서 7일간 ≪반야심경≫을 강설하였으며, ≪반야심경강설≫을 탈고하고 월남하여 이듬해 1월≪불교성전 반야심경≫을 전남일보사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한영(漢永) 등과 불교재건에 노력하며 역경원·선학원에서 적음(寂音) 등과 함께 경전번역과 강의에 힘썼으며, ≪불교대성전≫ 편찬에 착수하였다.

1952년전라남도 광주(光州)로 옮겨 동광사(東光寺)에 광주불교선우회를 창립하여 14년 동안 수선을 지도하였으며, 전남대학교에서 불교학 강의를 8년 동안 계속하였다.

1964년≪불교대성전≫을 탈고하였으며, 이듬해 광주 관음사(觀音寺)에서 광주불교학생회·불교보문회·광주불교신도회 등의 단체를 이끌었다. 1967년전라북도 전주(全州)로 옮겨 승암사(僧岩寺)에 불교강원을 개설하였고, 학인을 지도하였다.

전주노송정사(老松精舍)에서 나이 75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문하에는 송인현(宋仁炫)·이동호(李東豪) 등이 있다. 저서로는 ≪불교대성전≫·≪현공윤주일대법사설법집≫·≪오경통해 五經通解≫·≪불교성전 반야심경≫ 등이 있다.

참고문헌

「현공 윤주일대법사유필의 사료적 성격」(양은용, 『제17회 불교학술연구발표대회 발표자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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