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릉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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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제30대 문무왕의 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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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삼국시대 신라의 제30대 문무왕의 능비.
내용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비는 일찍이 무너졌고, 대편(大片) 2개, 소편(小片) 1개가 발견되었고, 대편 1개는 원석이 전하지 않았으나 2009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가에서 발견하였다. 석질은 적갈색 화성암으로, 대편은 최고 높이 52㎝, 너비 64㎝, 두께 24㎝이며, 소편은 두께 2㎝의 부등변삼각형으로 2자가 새겨져 있다.

대편 2개는 1796년(정조 20)경 경주부윤 홍양호(洪良浩)가 발견하였다고 하며, 이 때 탁본이 청나라의 유희해(劉喜海)에게 들어가 《해동금석원 海東金石苑》에 실리게 되었다. 《해동금석원》에서는 탁본이 4장임에 근거하여 제1·2·3·4석으로 호칭하여 4개의 비편으로 보았다.

그 뒤로 비문의 복원에 대한 연구와 함께, 1961년 경주시 동부동 주택에서 홍양호가 발견한 대편 2개 중 비신 하부에 해당하는 대편 1개가 발견됨에 따라 《해동금석원》의 제1석과 제4석은 비의 상부 앞면과 뒷면에 해당되며, 제2석과 제3석은 비의 하부 앞면과 뒷면에 해당됨을 확인하게 되었다.

건립연대에 대하여 유희해는 681년(신문왕 1)으로 추정하였고, 이마니시(今西龍)는 비문 중의 ‘국학소경(國學少卿)’이라는 직명과 《삼국사기》의 국학설치기사와 관련시켜 682년 6월 이후로 보았다. 한편, 민족항일기에 발견된 ‘四天王寺址文武王碑片(사천왕사지문무왕비편)’이라는 묵서(墨書)의 소편을 대편의 앞면 제2·3행 맨 아래 글자로 추정하여 문무왕릉비가 본래 사천왕사에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의하여 현재 사천왕사지 남쪽에 남아 있는 귀부(龜趺) 2기의 비좌(碑座) 구멍과 대편의 하부에 돌출한 촉[柄]의 치수를 대조한 결과, 서쪽의 귀부가 문무왕릉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동해에 뼈를 뿌렸다는 기사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한다.

사천왕사 근처에서 화장하여 부근에 의릉(義陵)을 만들었다거나,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창건하였으므로 능비만을 절에 건립하였으리라는 추측은 앞으로 좀더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비문은 마멸된 부분이 적지 않아 판독하기 어려우나, 대략 앞면은 신라의 찬미, 신라 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의 사적, 문무왕의 사적 및 백제평정에 관한 내용이며, 뒷면은 문무왕의 유언과 장례에 관한 내용 및 비문의 명(銘)이다.

이 중 주목되는 부분은 앞면 제4행 말에서부터 제6행에 걸친 부분으로, ‘십오대조성한왕(十五代祖成漢王)’·‘제천지윤전칠엽(祭天之胤傳七葉)’이라는 구절은 신라김씨의 내력, 즉 신라인의 조상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비문은 ‘국학소경 김□□(金□□)’가 지었으며, 글씨는 ‘대사(大舍) 한눌유(韓訥儒)’가 썼다. 글씨는 3.3㎝×3.2㎝의 정간(井間)에 새긴 자경(字徑) 2㎝ 안팎의 구양순체(歐陽詢體) 해서(楷書)로 명품이다.

참고문헌

『이계집(耳溪集)』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朝鮮金石總覽』 上
『朝鮮古蹟圖譜』 四
『증보한국금석유문』(황수영, 일지사, 1976)
『한국금석문대계』 3(조동원, 원광대학교출판국, 1983)
「신라문무왕릉단비의 발견」(홍사준, 『미술자료』 3, 1961.6.)
「신라문무왕릉단비추기」(홍사준, 『고고미술』26, 1962.9.)
「문무왕릉비에 보이는 신라인의 조상인식」(김창호, 『한국사연구』 53, 19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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