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출신. 3·1운동 당시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 일원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귀향한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로부터 전국적으로 퍼지고 있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4월 4일을 기하여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4월 3일 서리(西里)의 박영하(朴永夏)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4일 문성초 등의 청년회 회원들로 주축을 이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인근의 서리·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등을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나, 출동한 일본경찰의 무력행사로 해산당하였다.
이에 이문조(李文祚)·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4월 5일 다시 병영국민학교에 모여 인근지역을 시위하다가 일제의 경찰관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 때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1,000여 명에 이르자 일본관헌은 급히 울산으로부터 13명의 군경을 증원받아 시위군중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결국, 이문조 등 9명이 일본군경에 의하여 잡히자 문성초는 주재소에 투석하였다. 이에 일본군경은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선두에 있던 문성초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