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점 부조묘 관련 문서 일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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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부조묘 관련 문서 일괄
문익점 부조묘 관련 문서 일괄
출판
문헌
문화재
고려후기 문신 · 학자 문익점의 부조묘에 소장된 부장유물.
정의
고려후기 문신 · 학자 문익점의 부조묘에 소장된 부장유물.
개설

고려 말기의 문신 · 학자 문익점의 부조묘를 경상남도 단성에서 전라남도 보성으로 이안(移安)하면서 나온 일괄문서 15점이다.

내용

문익점의 부조묘는 원래 1401년(태종 1)경상도 단성에 설립되었는데, 1758년(영조 34)부터 1839년(헌종 5)까지 사손(祀孫) 단절, 부조묘 폐치, 1841년부터 1844년까지 사손 청허(聽許), 1854년(철종 5) 사손 인정(보성 文秉烈) 등의 절차를 거쳐, 1856년 단성으로부터 보성으로 이안되었다. 문익점부조묘관련문서일괄은 이 과정에서 나온 문서들의 일부로 전량은 아니며, 문익점 후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만들고, 국가로부터 발급받은 문서들이다. 문서의 작성연대는 주로 조선 후기인 18세기 말에서 19세기 말에 한정된다. 전라남도 보성군 미륵면 도개리 남평문씨 종중에서 소장하고 있고, 1988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문서의 종류를 살펴보면, 1787년(정조 11) 한용구(韓用龜)가 제술하여 도천원(道川院)에 내려진 견관치제문(遣官到祭文), 1811년(순조 11)에 순조의 명을 충훈부가 각 지방관에 내린 8면으로 된 수교(受敎), 면세 · 면역 · 수호 군보(軍保) 등과 관련된 절목 5건(1833년, 1835년, 1845년, 1860년), 1836년 문영일(文永馹)의 소청에 따라 충훈부에서 내린 계하사목(啓下事目, 12면), 1841년(헌종 7)에 29명의 각 지역 대표들이 문병렬을 사손으로 결정한 종중(宗中) 완문(完文), 문병렬의 사손 대립(代立)을 청하는 상서(上書), 1847년(헌종 13)과 1852년(철종 3년)에 문병렬 등이 폐단시정을 위해 선혜청에 올린 등장(等狀), 사손 · 복설 · 이안에 따른 경비 갹출을 독려하는 통문(通文), 문병렬이 단성으로부터 보성으로 이안하는 행로의 하동 · 광양 · 순천 · 함양 등 각 고을에 영송(迎送)을 청한 상서, 1857년(철종 8) 숙명옹주방에서 총 5,028량의 부채를 상환토록 하라는 관문(關文) 등이다.

의의와 평가

현재 문익점 부조묘에 보존된 문서들이 전량은 아니지만, 이 문서들은 조선 후기 향촌사회에서 부조묘라는 문족(門族)의 구심점을 통한 활동상과 부조묘 이안에 따른 관행과 실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문화재도록-도지정문화재편-』(전라남도, 1998)
「지방문화재조사보고서1-보성문익점부조묘조사보고서-」(김정호·이해준·김지민, 전라남도, 1988)
집필자
김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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