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신계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였고 뒤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9월 봉천성 집안현(奉天省輯安縣)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습득하였다. 1920년 4월부터 군정서의 중대장으로 활약하면서 1922년 9월 부하 6명을 이끌고 집안현에서 일본 경찰의 밀정을 제거하였다.
1923년에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평북 강계에 잠입하였고, 이후 1924년까지 집안현과 평안북도, 함경남도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6년 가을 봉천 일본총영사관경찰서에 체포되어 1927년 7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공소했으나 평양복심법원 역시 1927넌 10월 21일 사형을 선고하였다. 1928년 평양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