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명진(明進) 호는 무민재(无憫齋). 전라남도 장흥(長興) 늑용리(勒龍里)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문덕우(文德遇),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이세관(李世瓘)의 딸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다.
1773년(영조 49)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4년(정조 18) 대과에 급제하였다. 1785년 문익점(文益漸)과 문위세(文緯世)의 서원을 중수하였고, 충청·경상·전라도의 유생과 함께, 상소하여 강성사(江城祠)가 사액(賜額)되었으며, 1798년 호남(湖南) 유생과 함께 상소하여 문위세가 참판(參判)에 추증되었다.
1809년(순조 9) 대제학(大提學) 황경원(黃景源)에게 문익점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여 개수(改竪: 고쳐 세움)하였고, 1818년(순조 18) 문익점의 문집을 문계항(文桂恒)과 함께 간행하였으며, 다음 해에 문위세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중년 이후는 수방심(收放心) 3자에 심혈을 기울였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에 많은 연구를 하였다. 1893년(고종 30) 이창우(李昌祐)·박만원(朴晩源)·조대진(曹大振) 등이 그의 효행을 임금에게 알리자 장흥(長興)에 정문(旌門: 효자, 충신, 열녀 등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이 내려졌고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무민재문집(无憫齋文集)』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