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평(南平). 아버지는 판관 문관도(文貫道)이며, 문희성(文希聖)의 아우이다.
1611년(광해군 3) 제주판관으로 있을 때 명나라·일본·유구(琉球) 사람들이 탄 상선이 제주도에 표류해오자 목사(牧使) 이기빈(李箕賓)과 함께 선원을 모두 죽이고 화물을 탈취하여 왜구의 배를 공략 침몰시켰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왜적선이 아니었음이 밝혀져 경성(鏡城)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문희현이 호어(胡語: 만주어)에 능통한 것을 안 그곳 병사에 의하여 회령개시(會寧開市) 때 호인 접대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때 호인들이 그가 귀인인 줄 알고 추장 누르하치[奴兒哈赤]의 서신을 전하였다. 이 서신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가 발각되어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누르하치의 세력이 점점 커지자 나라에서는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 중립정책을 표방하고 있을 때이므로, 호어에 능한 문희현에게 다시 후금과의 통역을 맡게 하였다.
1623년 후금에 대하여 강경책을 주장하던 서인에 의하여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후금인과 내통하였다는 죄명으로 다시 정배되었다가 기자헌(奇自獻) 등과 함께 반란을 도모하였다는 이시언(李時言)의 고변으로 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