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부터 우리 나라에서 실시되고 있었던 양제단위(量制單位)에는 승(升)·두(斗)·석(石) 등이 있었는데, 그 실질 용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681년(문무왕 21) 당나라 양제도(量制度)에 따라 구량(舊量)의 3배량으로 개혁된 뒤 그 제도가 고려에 전해졌으며, 고려의 제도는 조선으로 전승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 초기의 단위량 사이에는 1승(升)=10홉[合], 1두(斗)=10승, 1석(石)=15두와 같은 관계로 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양제도만 단일양제도(單一量制度)로 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제제도(田制制度)에서도 단일면적제도로 되어, 조세량도 1부조(負租) 3승제(升制)가 실시되었다.
고려 때 성종은 이러한 불합리성을 없애기 위하여 전품(田品)을 3등급으로 나누어 992년(성종 11)부터 차등수조법(差等收租法)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조세량은 하등전은 옛 그대로 1부 3승씩을, 중등전과 상등전에서는 더 받게 하였다.
따라서 전품에 따른 조세량의 차이로 조세량 계산이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고려의 문종은 단일면적제도를 등급에 따른 차등면적제도로 고쳐 옛날과 같은 1부조 3승제도를 부활시킬 동과수조법(同科收租法)을 위하여, 먼저 1053년(문종 7) 전래의 표준양제도를 미곡양제(米斛量制)로 한 제가이양기제도(齊價異量器制度)를 제정, 실시하게 되었다.
이 때 제정된 각종 양제의 용적비를 살펴보면, 미곡:대소두곡:말장곡:비조곡=(1.20)3:(1.09)3:(1.39)3:(1.45)3와 같았다. 이 때 제정된 제가이양기제도는 조선 세종 때까지 계속 실시되었다.
그런데 세종은 1446년(세종 28) 제가이양기제도의 불합리함을 시정하기 위하여 미곡양기제도에 맞추어 단일양기제도로 환원시키는 양 제도의 체제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표준량이 바로 신라 문무왕 때에 제정된 표준량에 일치시킨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세종 때 표준량에서 고려 문종 때 미곡의 용적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밝혀진 고려 문종의 미곡양제도는 1승=10홉=596.4㎤, 1두=10승=5,964.2㎤, 1곡(斛)=7두5승=4만4731.8㎤, 1석=15두=8만9463.5㎤와 같다.
이를 근거로 계산된 문종의 양기척(量器尺)은 길이가 29.582㎝인 당대척(唐大尺)이었음도 밝혀졌다. 한편 ≪구당서 舊唐書≫ 식화지(食貨志)에 의하면 당대척 1척2촌이 바로 고구려척의 전신인 기전척(箕田尺)으로 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곡은 길이가 35.498㎝인 고구려척으로 1입방척(立方尺)이 되도록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35.498㎝의 길이는 기전척 35.510㎝와는 완전히 측정오차의 범위 내의 길이이므로, 이 미곡기(米斛器)는 통일신라 이전의 옛 표준양기가 남아 전해온 것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미곡의 용적에서 문무왕 때 양제개혁 이전의 1승량을 환산하면 198.8㎤가 되어, 이 양제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신양제(新量制) 1승량과 잘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의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였음이 확실시되며, 또한 이 표준양기는 1.5석의 표준양기로 제작되었던 사실도 밝혀졌다.
따라서 우리 나라 양제가 통일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연대는 중국의 주나라·춘추전국시대 때로 보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