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명보(明甫). 수찬 박수림(朴秀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담손(朴聃孫)이고, 아버지는 박은(朴誾)이며, 어머니는 좌의정 신용개(申用漑)의 딸이다.
진사로 출사(出仕)하여 1538년(중종 33)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1540년 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이준경(李浚慶) 등과 함께 재이(災異)를 물리치려면 성의를 다하여 하늘을 감동시켜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543년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가 되고 이듬해 우문학(右文學)이 되었다.
1547년(명종 2)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교서관교리 및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을 지냈다. 1549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재직 시에 상소를 올려 능침(陵寢)의 절에서 소란을 일으킨 유생들을 정거(停擧)시키고 절에 가지 못하도록 금하게 되면 왕이 이단(異端)을 숭상하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듬해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암행어사가 되어 수령들의 부정을 감찰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1551년에 다시 황해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으며, 1553년 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1555년 참찬관(參贊官) · 좌승지를 거쳐 특명으로 공조참판이 되었다가 이듬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그는 글씨에 능하여 많은 금석문(金石文)을 남겼고 『중종실록(中宗實錄)』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