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고종 28) 10월 22일 충청감사로 부임한 조병식(趙秉式)이 동학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자, 동학교도들은 종래 농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민소(民訴) 형태를 취하여 청원운동으로서의 교조신원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교조신원운동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다수의 동학지도자들이 등장, 신원운동을 이끌어 가는데, 충청도 지방의 유생 출신 교도인 박광호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박광호는 같은 충청도 출신 교도인 서병학(徐丙鶴) 등과 함께 1890년대 초반의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하였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1871년 3월 이필제(李弼濟)·강사원(姜士元, 姜時元)·최경오(崔景五, 崔時亨) 등이 영해에서 최초로 일으켰다. 이후 1892년 7월 서인주(徐仁周)·서병학 등이 교주 최시형에게 선사(先師: 崔濟愚)의 ‘신원일사(伸寃一事)’를 건의하고 독단으로 그 해 10월 공주에 교도들을 모이게 한 뒤,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동학에 대한 ‘신원금폭(伸寃禁暴)’의 소장을 제출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최시형이 그 해 11월 교조신원을 위한 삼례취회(參禮聚會)를 주도,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으로부터 동학교도에 대한 지방관의 탄압을 금지하도록 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전라감사의 동학교도 탄압을 금하는 공문에도 지방관들의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과 탐학은 갈수록 심하여졌다.
이에 동학 지도층은 서울에 올라가 복합상소를 통해 교조의 신원과 동학 포교에 대한 공인을 요구하기로 결정하였고, 소수에 박광호가 임명되었다.
서울 복합상소에 참여한 동학지도자들은 대부분 최시형의 지도를 받는 북접계(北接系) 인물들로서, 강시원·손병희(孫秉熙)·김연국(金演局)·서병학·박인호(朴寅浩)·손천민(孫天民)·남홍원(南弘源)·박석규(朴錫奎)·임규호(任奎鎬)·박원칠(朴元七) 등 40여 명이었다.
박광호 등 40여 명은 1893년 2월 8일 과거시험을 치르는 선비들로 꾸미고 상경, 서울 도소(都所)인 한성부 남서(南署) 남소동(南小洞) 최창한(崔昌漢)의 집에 모였다. 그리고 2월 11일 광화문 앞에서 3일 낮밤을 슬프게 절규하며 상소하였다.
그러나 박광호 등이 주도한 서울 복합상소는 일반 동학교도들의 절실한 문제였던 부당주구(不當誅求) 반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동학의 포교 공인만을 주장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하층 교도들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파 교도들의 독자적인 행동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복합상소 3일째 되는 날, “너희들은 각각 집에 돌아가 업에 종사하라. 그러면 마땅히 너희의 원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라는 국왕의 비답이 내려지자, 동학교도들은 해산하여 귀향하였다. 그러나 복합상소 후 동학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은 ‘각 도의 사람(교도)들이 관리의 학살을 감당치 못할’ 정도로 심해져 복합상소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교조신원운동은 일대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데, 그 구체적인 형태가 바로 같은 해 3월 7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기치로 한 보은취회(報恩聚會)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이, 박광호는 1892∼1893년에 걸쳐 고조된 형태로 전개되는 교조신원운동에서 충청도 지방을 대표하여 신원운동을 주도한 동학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