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집』은 노계의 현손 박성규(朴成規)에 의해 1707년(숙종 33) 쯤에 초고본(草稿本)이 이루어졌고, 1831년(순조 31)에 3권 2책의 초간(初刊)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후 3차에 걸쳐 보각(補刻) · 증보(增補)가 이루어졌다. 1차 보각은 노계의 10대손 박용진(朴容鎭)이 사망한 1900년 이전에 이루어졌으며, 이 때는 세계도(世係圖)와 권2의 속부(續附)가 보각되었다. 2차 보각은 1904년 권2의 끝에 도산가(陶山歌)를 추가하였고, 3차 보각은 노계의 11대 종손 박수문(朴洙文)이 원판 중 훼손된 판목을 개각하고, 새로 발견된 전(傳)노계 작품을 추가하여 1960년에 완료하였다. 즉 노계집 판목은 초간에다 보각을 하였을 뿐 중간(重刊)이나 복각(覆刻) 된 적은 없다.
3권 중 1·2권은 한시문(漢詩文)이며, 3권은 한글의 가사(歌辭) · 시조(時調)이다. 여기에는 가사문학 7편과 시조 67수(首)가 수록되어 있다. 권1·2는 서(序) 4매, 세계(世系) 4매, 도설(圖說) 3매, 본문 42매, 발문(跋文) 6매이며, 권3은 가사 · 시조 35매, 후서(後序) 2매이다.
박인로는 영천(永川) 출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別侍衛)로 전공을 세웠고,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사졸(士卒)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태평시(太平詩)」 · 「선상탄(船上嘆)」을 지었는데, 이는 전쟁문학가사 중 뛰어난 작품이다. 뒤에 선전관(宣傳官) · 만호(萬戶)를 지내고 귀향하여 도학(道學)을 닦으며 나라와 자연을 사랑하는 내용의 가사와 시조를 남겼다.
이 목판은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 거주하는 노계의 종손인 박병일(朴秉一)이 소장하고 있고,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목판은 모두 99매이다.
박노계집목판은 노계집 고사본(古寫本, 2권1책, 38장, 22×20㎝, 박병일 소장)과 비교의 측면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사본에는 노계가 지은 시문과 부록, 가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목판본에 없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