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식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 일제강점기
대한제국기 때, 문태서 의진과 합세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대구형무소에서 동지들을 탈옥시킨 후 자결한 의병장.
이칭
  • 춘실(春實)
인물/근현대 인물
  • 관련 사건을사조약
  • 본관밀양(密陽)
  • 사망 연도1914년
  • 성별남성
  • 출생 연도1875년(고종 12)
  • 출생지전라북도 장수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흥수 (춘천교육대학, 한국사)
  • 최종수정 2024년 05월 27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대한제국기 때, 문태서 의진과 합세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대구형무소에서 동지들을 탈옥시킨 후 자결한 의병장.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호는 춘실(春實).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장수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무주 · 장수 · 진안 · 용담(龍潭) 등지에서 국가존망의 때에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는 격문을 배포하였다.

이 격문을 보고 모인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 구봉산(九峰山)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1906년 문태서(文泰瑞)의 의병대와 합세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1907년 무주 상창곡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1908년 무주 구천동에서 교전하였다.

1909년 3월까지 진안 천반산(天盤山) · 성수산(聖壽山), 장수 덕유산(德裕山), 구천동, 적상산(赤裳山) 등지에서 60여 회나 교전하였으며, 200∼7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경상북도와 전라북도를 무대로 일본군 300여 명을 사살하고 400여 정의 무기를 노획하였다.

1909년 3월 일본군에 붙잡혀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1914년 탈옥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자, 같은 해 6월 형무소의 벽을 파괴하여 100여 명의 동지를 탈옥시킨 뒤 자진(自盡),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 -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 - 『한국독립운동사』 1(국사편찬위원회, 1965)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콘텐츠 이용 안내

콘텐츠 수정 요청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주제
0 / 500자
근거 자료
첨부된 파일이 없습니다
파일선택

최대 5개, 전체 용량 30Mb 첨부 가능

작성 완료되었습니다.

작성글 확인

다운로드가 완료되었습니다.

다운로드할 미디어를 선택해주세요.

모든 필수 항목을 입력해주세요.

다운로드할 미디어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다운로드 중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미디어 다운로드

  • 이용 목적을 상세히 작성하여 주세요.
    서비스 개선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표기 : [사진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필수 입력 항목입니다.

이용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