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강원도 강릉 출신. 교역자(敎役者)인 어머니 고의대(高義大)를 따라 개성으로 이주하여 1923년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28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화여자전문학교 시절부터 공창(公娼)의 폐지와 금주·금연 등의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서 1932년 테네시주 스카릿(Scarlet)대학을 졸업한 후 같은 해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교 피바디(Peabody) 사범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윤리학을 가르쳤다. 1935년 이기붕(李起鵬)과 혼인함과 동시에 이때부터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총무로 10년간 활동하였다.
광복 후 남편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비서로 정계에 진출하는 데 조력하였으며,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세계YWCA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밖에 대한걸스카우트연맹과 대한부인회 등을 지도하였고,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 과장을 거쳐 문리대학 학장 및 부총장에 취임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장남 이강석(李康石)을 대통령의 양자로 삼게 하는 등 이들 부부의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국민의 규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자 경무대(景武臺)로 피신, 4월 28일 가족 모두가 권총으로 집단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