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성백(星伯). 서울 출신. 박종림(朴鍾林)의 아들로 박종악(朴鍾岳)에게 입양되었고, 어머니는 오지수(吳趾秀)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직장(直長)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46년 평안도청북암행어사가 되어 강계 전 부사 윤우현(尹寓鉉) 등 다수의 수령이 박영보의 서계로 처벌받았다.
1849년에는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도청사직(都廳司直)으로 활동해 가자(加資)되었다. 1853년(철종 4)·1854년·1859년에 걸쳐 이조참의를 역임했고, 1861년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사(冬至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4년(고종 1) 사헌부대사헌 및 이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65년·1866년에도 대사헌을 지내며 고종에게 언로(言路)를 열어 충언을 듣고 절검(節儉)으로 애민(愛民)할 것을 간언하였다. 1867년 영선군(靈善君)이 되고,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다.
다시 1869년 형조판서를 거쳐 같은 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경기도관찰사 재직 때 환곡제의 정비에 노력하고 효행을 권장했으며, 군기(軍器)의 보수에도 힘썼다.
또한, 실농(失農)·실업자의 진휼(賑恤)에 관심을 쏟았고 장시(場市)의 상도덕를 확립하기 위해 세력가를 처벌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추천으로 연임되었다.
재임기간 중 신미양요가 발생하자 이의 대처에 노력하였다. 양요 이후에는 해안 요충지의 방비를 위해 인천부(仁川府)에 포과(砲科)를 설치해 매월 과시(課試)를 보아 거수(居首) 1인을 매년 뽑아 등용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1872년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남긴 글로는 신미양요 당시 강화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과 함께 올린 「역진미국병선자요정형자문략(歷陳美國兵船滋擾情形咨文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