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진중에 자원하여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무신 · 공신.
이칭
명화(命和)
동계(東溪)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4년(중종 39)
사망 연도
1598년(선조 31)
본관
밀양(密陽)
주요 관직
인동부사
관련 사건
임진왜란|당포해전|노량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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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진중에 자원하여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무신 · 공신.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화(命和), 호는 동계(東溪). 참판 박눌생(朴訥生)의 6대손이며, 아들이 병조참의 박응수(朴應秀)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성품이 용맹, 과감하고 지략이 있었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사재원(司宰院) 주부(主簿),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진중에 자원, 종군하여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적장을 쏘아 죽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이순신이 그 장재(將材)를 인정, 선봉으로 내세웠다.

이듬해 5월에는 경상도의 감사와 병사(兵使)로부터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듣고, 이순신의 명을 받아 진주의 사정을 정탐, 보고하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계속 종군하면서 화전(火箭)을 쏘아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동부사(仁同府使)에 임명되었다.

1598년 겨울, 통제사 이순신이 명나라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적군을 노량해상에서 요격할 때 명나라 군중에서 약속을 어겨 우리 장병 중 많은 사상자가 나게 되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흥양(興陽)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봉암사가 훼철되자 고흥(高興)의 숭양사(崇陽祠)에 아들 박응수와 함께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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