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명화(命和), 호는 동계(東溪). 참판 박눌생(朴訥生)의 6대손이며, 아들이 병조참의 박응수(朴應秀)이다.
성품이 용맹, 과감하고 지략이 있었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사재원(司宰院) 주부(主簿),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진중에 자원, 종군하여 당포해전(唐浦海戰)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적장을 쏘아 죽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자, 이순신이 그 장재(將材)를 인정, 선봉으로 내세웠다.
이듬해 5월에는 경상도의 감사와 병사(兵使)로부터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보고를 듣고, 이순신의 명을 받아 진주의 사정을 정탐, 보고하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뒤에도 계속 종군하면서 화전(火箭)을 쏘아 여러 번 전공을 세웠으며,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인동부사(仁同府使)에 임명되었다.
1598년 겨울, 통제사 이순신이 명나라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적군을 노량해상에서 요격할 때 명나라 군중에서 약속을 어겨 우리 장병 중 많은 사상자가 나게 되었다. 이때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고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흥양(興陽)의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봉암사가 훼철되자 고흥(高興)의 숭양사(崇陽祠)에 아들 박응수와 함께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