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박무림(朴茂林). 평안남도 평양 출신.
을사조약 강제체결로 외교권이 상실되자 북간도로 건너가 1906년에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과 더불어 프랑스 신부 큐리의 협조를 얻어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열었다.
그리고 한인유지들과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를 조직, 국자가(局子街)에 본부를 두고 간도 한인들을 규합하려 하였으나, 청과 일본의 방해로 곧 산회되고 말았다. 그뒤 이상설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사로 떠난 다음 재정난이 겹쳐 서전서숙이 폐숙되자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서전서숙의 정신을 계승한 명동서숙(明東書塾)을 건립, 그 숙장(塾長)으로 활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