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년(공민왕 11) 김용(金鏞)이 거짓으로 계책을 꾸며 홍건적 격퇴에 공을 세운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를 죽이려 하자, 만호로서 김용의 지령을 받아 이방실을 용궁현(龍宮縣: 지금의 예천군 용궁면)에서 잡았다.
그 해 청주수원도병마사가 되어 홍건적을 방어하였으며, 이듬해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서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공신당(功臣堂) 벽에 도형되었다.
이듬해 최유(崔濡) 일당이 덕흥군 왕혜(德興君王譓: 충선왕의 셋째아들)를 왕으로 받들고 요양성병(遼陽省兵) 1만인을 동원하여 침입하자, 서북면도원수 경복흥(慶復興)의 휘하에서 도병마사가 되어 강계와 독로강(禿魯江) 등지를 수비하고, 최영(崔瑩)·안우경(安遇慶) 등과 함께 적을 물리치고 개선하였다.
1365년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는데, 그 해 신돈(辛旽)이 권문세족을 제거할 때 이구수(李龜壽)·양백익(梁伯益)·석문성(石文城)·김수만(金壽萬)·이령(李寧) 등과 함께 모함을 받아 광양(光陽)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열암사(裂巖寺)에서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