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박종식(朴宗植)으로, 황해도 은율 출신이다.
국권이 침탈되자 무력항쟁을 위해 1918년 만주로 건너가 1919년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근거를 둔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였다.
그 해 오동진(吳東振)·윤하진(尹河振)·장덕진(張德震) 등과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을 조직하였다.
1920년 2월 장덕진·김예호(金禮浩) 등과 평안북도 벽동군 강변에 있는 일본 헌병의 분파소(分派所) 두 곳을 습격해 일본군을 사살하고 무기를 확보하였다. 다시 벽동군(碧潼郡) 학회면(碧潼面)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경찰 2명을 사살한 다음 면사무소를 불태워버렸다.
1920년 7월 관전현(寬甸縣)에서 오동진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 결사대장으로 활약하였다.
미국의원단이 7월(실제 방한 8월)에 내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장덕진·문일민(文一民)·우덕선(禹德善)·안경신(安敬信) 등과 같이 평양으로 가던 중 안주군 입석면(立石面)에서 일본경찰에게 검색을 당하자 이를 사살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뒤 평양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어 실패하였다.
일본경찰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만주본영으로 돌아왔다. 평양지방법원의 궐석판결에서 종신형이 언도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관전현에 광복군총영 통신사무부를 설치하고 각 방면의 독립단체와 연락을 취하였다.
1922년 강석훈(姜錫勳)·이한호(李漢浩)·박진(朴震)·장덕진 등과 10명의 연서로 국민대표주비회(國民代表籌備會)의 조속한 개최를 촉구하였다. 1926년 나석주(羅錫疇)가 의거를 위해 귀국할 때 이화익(李化翼)·최천호(崔天浩) 등과 같이 무기와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1934년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평안남도 성천에서 일본경찰에 잡혔다. 1936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언도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 복역하다가 옥사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