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영조 24) 건립. 1995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박훈은 유학자 박증영(朴增榮)의 아들로 1504년(연산군 10) 사마시에 합격했고 그 뒤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지내던 중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하여 17년간 유배되었다. 1536년(중종 3)에 풀려나 말년을 외가에서 보냈다. 시호는 문도(文度).
이 신도비는 1748년(영조 24)에 그의 인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박필주(朴弼周)가 비문을 지었고 윤득화(尹得和)가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두전(頭篆)을 했다. 비 뒷면에는 성혼(成渾)이 지은 묘문(墓文)이 새겨져 있다. 비는 화강암제 네모받침 위에 비신(碑身)을 얹고 그 위에 화강암으로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일반 형식이다. 석질이 양호하여 모든 부분이 잘 남아 있으며 특히 덮개돌의 세부 조각이 정교하다. 1957년 겹처마 팔작지붕의 비각(碑閣)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