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선(防船)이라고도 한다. 전선(戰船)보다 작고, 병선(兵船)보다 크다.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판옥선(板屋船)이나 조선 후기의 전선 등 대형 전투함은 선체 위 전면에 상장(上粧)을 만들어 2층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방패선은 선체의 상갑판 위 양쪽 뱃전에 적당한 높이의 방패판을 세워 적의 화살과 돌로부터 군사를 보호한 전투함이다. 『전라우수영지(全羅右水營誌)』에 따르면, 선군(船軍)의 수는 본영(本營) 전선 180인, 각 진(鎭) 164인인 데 대하여, 본영 방패선은 55인, 각 읍진(邑鎭) 방패선은 31인이다.
또 방패선을 새로 만드는 데 쓰이는 송재(松材) 수를 보면, 전선이 대송 12∼14주, 중송(中松) 78∼89주, 소송(小松) 65∼77주, 소소송(小小松) 35∼40주인 데 대하여, 방패선은 중송 56주, 소송 24주, 소소송 15주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방패선은 전선보다 훨씬 작은 군선으로, 오히려 중형 무장함인 병선에 가까운 크기이다. 방패선은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도 사용된 일이 있었다. 『선조실록』을 보면, 1555년(명종 10) 이래 “적을 막는 데에는 판옥선·방패선·협선(夾船)이 긴요하게 쓰여졌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방패선이 을묘왜변 때 판옥선과 함께 개발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 뒤 임진왜란 때에 방패선이 실전에 나선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임진왜란 뒤에 방패선이 다시 등장한 것은 인조 때부터이다.
그런데 황해도와 평안도 등은 삼남(三南)과는 달라서 본래부터 바다 방어가 소홀한데다가, 병자호란 뒤 1637년(인조 15)부터는 모든 방어설비가 포기되다시피 되고, 종래 삼남에서 만들어 쓰던 군선들마저도 너무 커서 물이 얕은 포구에서는 운용하기 곤란하였다. 그러므로 보다 작은 전투함인 방패선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숙종 때까지도 이 배는 그다지 중용되지 못하고 있다가, 전선이 너무 커서 배에 드는 자재가 낭비되고, 물이 얕은 서해안에서는 운용하기 어렵다는 것이 논란되어, 점차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서해안까지 보급되었다.
이와 같은 점은 1744년(영조 20)에 편찬된 『속대전』에 들어 있는 각 도의 군선배치 상황에 잘 나타나 있다. 각 도의 방패선 척수는 경기도 10척, 충청도 21척, 황해도 26척, 평안도 6척, 전라도 11척, 경상도 2척 등 모두 76척으로, 그 중에서 충청도 이북 4도의 척수가 63척으로 전체의 83%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 후기 군선의 편제에서 방패선을 배치한 상황을 보면, 방패선 1척과 병선 1척, 사후선 2척으로 되어 있는 곳과 전선 1척, 방패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 3척으로 되어 있는 곳으로 구별되었다. 그런데 전자는 황해도와 충청도의 각 읍진이고, 후자는 바다방어가 보다 중요한 전라우도의 각 읍진이다.
방패선은 시대가 흐를수록 척수가 늘어났는데, 1770년에 편수된 『동국문헌비고』를 보면, 97척으로 전선의 척수 83척보다 오히려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