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3·1운동 때 시위에 참가한 뒤 만주 관전현(寬甸縣)에 본부가 있던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에 가입, 활약하였다.
1921년 6월에는 국내에 진입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소속의 항일투사들을 하광동 본가에 은닉시키고 있던 중 일본경찰 10여 명의 습격을 받았다. 교전 끝에 항일투사들은 무사히 피신하였지만 백봉즙의 집은 소각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총영에 가입,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선천군청 및 신의주역 폭탄투척, 일제밀정 처단 등의 혐의를 받아오던 윤학승(尹學昇)·윤학소(尹學昭) 등과 함께 1926년 10월 중국 장춘(長春)에서 신의주경찰서소속 형사대에 잡혀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1929년 3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미결기간이 통산되어 곧 풀려났다. 이후에도 계속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아왔으며,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