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진태(高鎭泰)·김인수(金仁洙) 등과 같이 의주군 고령면 영산 장터에서 다수의 군중을 모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후 곧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 관전현(寬甸縣) 납자구(拉子溝) 유양전(柳楊甸)에 주거를 정하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명서(李明瑞)·김근하(金根河)·함일(咸一) 등과 국내에 들어와서 평양 등지의 일제시설을 파괴하였고, 선천군 대산면장 김병준(金炳鐏)과 서기 김은(金殷) 등으로부터 군자금 749원 59전을 거두고 독립운동의 방해자라고 하여 살해하였다.
또한 평안남북도 각지를 왕래하며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였다. 1920년 4월에 다시 평양의 일제기관을 습격할 때 일본경찰이 부인 ‘차씨(車氏)’를 고문, 치사하였다.
1921년 대한독립단 본부로 돌아오다가 관전현 상루구(上漏溝)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총독 사이토[齋藤實]에게 장문의 경고서(警告書)를 보내고 순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