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첩’은 흰 터럭으로 만든 직물이라는 자의가 내포된 명명이 아니고 터키어의 면직물을 의미하는 ‘Pakhta’의 한자어 음역 또는 파사어(波斯語)의 면직물을 나타내는 ‘Bag'tau’나 ‘Bug'tau’의 음역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어서 면직물의 한 종류로 보고 있다.
『양서(梁書)』에도 고창(高昌)에서 누에고치와 같은 초실(草實)을 백첩자(白疊子)라고 하며, 그것으로 포를 만든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舊唐書)』에는 남만과 서남만에서 고패초(古貝草)의 꽃으로 만드는데, 성긴 것은 고패라고 하고 섬세한 것은 백첩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제직되었던 듯, 『한원(翰苑)』의 고려조에 고구려에서 제직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신라에서 경문왕 때에 40승백첩포(四十升白氎布)를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책부원귀(冊府元龜)』에는 고려에서 왕건이 백첩을 공물품으로 사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에도 혜종 때에 백첩포 200필을 오대후진(五代後晉)에 보낸 기록이 있다. 그런데 고구려·신라·고려 초의 백첩포는 문익점에 의한 면종자반입 이전의 것이라는 데에 흥미가 있다.
면과 면직물의 제직기술은 일찍이 인도에서 발전하여 서기 전후연대에 이미 로마·페르시아·동남아시아·하이난도(海南島) 등에 전파되었다.
우리 나라는 일찍부터 인도·하이난도·동남아시아지역과 통교하였던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볼 때, 면직물에 대한 지식이 일찍이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