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가순(可純), 호는 간재(簡齋). 성균생원 변경장(邊慶長)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감)하자 김성일(金誠一)이 초유사(招諭使)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때 가산을 팔아 구입한 쌀 100섬을 상주진(尙州鎭)으로 보내니 상주의 진장(鎭將) 김각(金覺)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뒤 김성일을 찾아 진주로 갔으나 김성일이 이미 전사한 뒤였으므로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군무(軍務)에 종사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화왕성(火旺城)으로 달려가 박수춘(朴壽春)·성안의(成安義)·남사명(南士明)·유복기(柳復起)·정사성(鄭士誠) 등과 협력하여 대적(對敵)하였다. 광해조 때에는 선조가 국초에 나라로부터 하사받은 노비 30가구가 김해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추노(推奴)하려다가 그들의 무고를 입어 경옥(京獄)에 감금되었다.
인조반정으로 1623년 석방되었으며 노비 100가구를 하사받았다. 행의(行義: 의로운 행실)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였으며, 뒤에 수직(壽職: 노인에게 내린 관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었다. 1686년(숙종 12) 경상도안찰사가 그의 충효에 대한 행적을 조정에 알리니 특별히 정려를 명하였다. 저서로는 『간재집(簡齋集)』 2권이 있다.